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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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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흰 소의 눈을 가지고 있다

  • 입력 2004.04.07
  • 수정 2024.11.24

  오랜만에 영국사에 들었습니다. 은행나무 곁에서 흰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제일 먼저 반갑게 맞이하여 줍니다. 말 없는 짐승이지만 저 놈 만큼 정이 깊은 동물도 드물 것입니다. 이 흰둥이의 어미는 진도산 검둥개 영순이었습니다. 영순이는 지금 흰둥이가 그렇듯이 스님과 공양주와 함께 절집의 어엿한 식구로 같이 하였습니다. 개가 어찌 절집의 식구로서 함께 할 수 있겠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개에게도 나름대로의 소임이 있습니다. 스님과 공양주가 부득이 절을 비우게 될 때면 검둥이는 홀로 남아 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은 검둥이를 본래 개의 주인에게 돌려주어 영국사에 없지만 그 검둥개 영순이는 영민한 개였습니다. 절을 찾아온 신도들이나 관광객들에게 검둥개는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곁으로, 망탑봉으로 멀리 남고개까지 길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단지 지킴이로서의  소임만이 아닌 공동체적 삶의 일원으로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 영순이가 예쁜 강아지를 네 마리나 낳는 경사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저를 꼭 빼어 닮은 검둥이 두 마리 그리고 흰둥이와 호피를 각각 낳았는데, 그 날부터 공양주 보살님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맛난 음식을 챙겨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마치 개를 대하는 것이 제 살붙이를 돌보는 것처럼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유별나게 영순이와 그 새끼들을 좋아했던 공양주 보살을 영순이도 제 새끼들을 데리고 졸졸 따라 다니곤 하였답니다. 오죽하면 스님을 비롯해 저와 처사까지, 심지어는 신도들도 공양주 보살을 영순이 엄마라고 불렀겠습니까.

   강아지들이 커가면서 장난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 현재 영국사에서 기르고 있는 저 흰둥이가 대단하였습니다. 그 놈이 하는 짓은 꼭 심술궂은 놀부를 닮아 있었습니다. 제 배가 부르면 다른 강아지들이 밥을 못 먹게 밥그릇 뒤업기 일쑤였습니다. 때론 저들끼리 장난으로 치고 받으며 놀다가도 격렬한 싸움으로 번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요, 그때도 역시 흰둥이가 늘 말썽입니다. 다른 형제들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스님의 고무신이나 내 운동화를 잘근잘근 십어 못 쓰게 만드는 것도 그 놈의 짓입니다. 영국사에 새 물건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밤새 감쪽같이 이 말썽꾸러기 흰둥이가 없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공양주 보살과 우리는 흰둥이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요, 글쎄 제 새끼는 제 어미가 찾는가 봅니다. 영순이는 말은 못하고 보살의 치마를 물고 자꾸만 자꾸만 어디론가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순이를 따라가게 되었는데요, 글쎄 그 흰둥이라는 놈이 해우소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똥통에 빠진 흰둥이, 결국 흰둥이를 살린 것은 검둥이 영순이였던 것입니다.             

    

   

      개는 검으나 흰 소의 눈을 가지고 있다

     

      영동군 천태산 영국사

      진도산 개 한 마리 가부좌를 틀고

      움 속의 반야심경을 왼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해 떨어지기 전

      하루에 한 번씩 빛의 소리를 훔치고

      어둠이 내리는

      서쪽을 향해 낭창한 울음 짖어댄다

 

      적묵당(寂黙堂) 뒤로

      오늘 저녁 수천 수만의 별들이 쏟아진다

 

      세상의 끄트머리가 흰 길인가

      사람을 낚는

      검은 개

      절 마을 잠든 곤한 새벽

      별빛을 쫒아 움 속의 반야심경을 왼다 

                                           양문규,「검둥개」전문       

 

 

   열반경에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제각기 불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불성 때문에 수행을 하면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는 자연 속에,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 불성이라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에 부처님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언젠가는 갈고 닦으면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선의 화두 가운데 조주 선사의 무자(無字) 화두가 유명합니다. 당대에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답니다. 그런데 스님은 없다고 대답하였답니다. 조수 스님을 찾아온 한 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고 왜 물었을까요. 그리고 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답했을까요. 불교의 가르침에는 분명 모든 중생들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에 불성이ꡐ있다‘는 부처님의 말씀과 개에게는 불성이ꡐ없다ꡑ는 조주 선사의 언행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참으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는 것일까요. 조수 선사가 스님에게 개에는 불성이 ‘없다’고 한 말씀은 어떤 의미를 닮고 있을까요. 

   영국사에 머물면서 흰둥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포행길에도 그렇거니와 은행나무 곁으로 나갈 때에도 흰둥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합니다. 내가 집으로 가려고 버스를 타기 위해 누다리까지 걸어가는 데, 이때에도 눈치 없이 따라 나서곤 합니다. 저나 나나 외롭기는 마찬가지니 가깝게 지내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겁니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아닌 한 식구처럼 정이 나는 것이 어찌 산중의 생활에서만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가끔 검둥이가 그랬듯이 흰둥이도 사람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다음 생에는 흰둥이가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래봅니다. 그의 눈빛은 제 어미 영순이 같이 늘 젖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망울, 그들이 원하는 게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산방에 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처럼 그도 어미와 형제를 떠나 보내고 홀로 이곳에 남아 무언가를 키워나가는 것이겠지요. 개는 검거나 희지만 흰 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 속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수도승 같아 보입니다. 어둠이 내리는 서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낭창한 울음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이 마치 반야심경을 외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는 자여, 가는 자여, 지혜의 바다%B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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