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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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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천래강에서

  • 입력 2004.05.06
  • 수정 2024.11.20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전개과정에서 고향의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많은 시인들은 고향의식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결핍된 현실사회를 직․간접적으로 형상화하는 노력해 왔습니다. 이들의 상실된 고향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민족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회복하여 민족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60년 이후 도시 산업화는 농촌의 붕괴를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곧 농촌해체라는 고향상실의 큰 아픔을 우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이 시기의 시인들 역시 농촌의 공동체적 삶이 해체된 피폐한 현실과 아픔을 고향의식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이겠지요. 당시의 시편들은 1930년대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고향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시적 경향은 다르지만 고향상실이라는 대전제 속에서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살이의 정황이나 붕괴해 가는 풍경을 구체화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삶의 원형이 훼손된 데 따른 안타까움을 반영하는 시적 결과입니다.     

   고향은 한 개인이 태어나 자라고 늙어서 죽어 묻히는, 스스로가 자신이 주인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한 자아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혈연적 동질성이나 문화적 동질성을 전제로 한 하나의 통합된 정신세계를 일컫습니다. 시에서 고향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본래적인 생의 의미를 함의합니다.     

   내 시의 근원도 여기에 뿌리를 같이하는 것이지요. 

  

      천래강에서 한 여자와 눈을 맞춘다   

                                       ― 양문규, 「천래강에서」전문

 

      강물은 봄날 같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나무를 타고 올라

      꽃을 피운다 

 

      홀로 걷고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강 건너 산자락 

      언제 마을이 들어섰는가

      물방망이 소리

      골목으로 흐른다  

 

      그녀와 나는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허물어진 돌담 골목을 벗어나

      강 건너 마을로 간다  

 

      끼니때가 되면 아궁이에

      어김없이 밥을 끓이고

      쇠죽을 끓이는 

      생솔가지가 검붉게 탄다  

 

      강물 위로는   

      청둥오리 떼들이    

      차디찬 물낯바닥에

      낮게 깔리는

      달빛을 타고

      적멸보궁에 오른다 

  

      그녀와 나는 오랫동안 그 마을에 머물고 있다 

 

 

   나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을 그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습니다. 그것은 상실된 고향에 대한 의식의 발로이지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1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 그곳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초토화된 폐허와도 같았습니다.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고 집과 담장은 허물어져 마치 흉집처럼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온기라고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용악,「낡은집」중에서)들만 즐비할 뿐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시인 자신의 가족사의 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용악의 「낡은집」은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식민사회 제 구성원의 삶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농촌이나 오늘의 농촌현실이 어렵기는 시대가 변했어도 마찬가집니다. 아니 어쩌면 이용악이 살았던 당대의 농촌현실보다 작금의 농촌이 보다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는 본질적으로 이상주의자의 꿈을 언어로 빚어낸 삶의 한 양식입니다.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각박한 삶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이상적 낙원을 실현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시인이 언어에 존재하는 삶의 양식이라 할지라도 결핍된 현실사회를 극복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지요.          

   위의「천래강에서」는 이런 결과의 산물입니다. 강둑을 거닐면서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며 상실된 고향이 아닌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향의 보습을 복원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영국사 근처의 마을이나 강 건너 마을이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요. 어쩌면 강 건너 언덕빼기 마을은 내가 살고 있는 고향보다 흉집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강 건너 마을을 사람이 사는 마을로 대상화하였던 것이지요.   

   한 여자와 눈을 맞춤으로, 강물은 봄날 같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나무를 타고 올라 꽃을 피웁니다. 홀로 걷고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강 건너 산자락, 둘이서 그곳으로 갑니다. 사람과 사람이 연하며 살아가는,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는 환영에 잠깁니다. 꿈속이라도 나는 그러고 싶은 거지요. 내 사랑하는 여자와 손을 맞잡고 강 건너 마을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아궁이에 어김없이 밥을 끓이고, 쇠죽을 끓이는 생솔가지 검붉게 타는 집에 살고 싶습니다. 강물 위로는 청둥오리 떼들이 차디찬 물낯바닥에 낮게 깔리는 달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풍경을 보면서 말입니다.   

   백석은「여우난골族」등의 많은 시편 속에서 유년의 화자를 내세워 과거의 다복했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구성하는 갖가지 사물과 관습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적 삶의 원형을 형상화해 주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회상된 경험들은 그 경험들이 이끌어낸  본디 모습보다도 더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농촌을 고향으로 두고 사는 현실적 삶은 대단히 고난합니다. 고향을 두고 사는, 현실사회의 어려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문학 속의 고향은 따스하게 가꾸고 싶습니다. 유년의 화자가 아닌 성인 화자를 내세워 사람이 사는 마을로 형상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지요. 회상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 몸 속에서 꿈꾸는 삶의 원형을 시작품 속에 담고자 합니다.     

   무릇 사라지는 것들은 본래적 생의 원천이며 그리움입니다. 내 시 속의 고향도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 속에 존재할 것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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