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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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이 피었습니다
이른 봄날부터 늦은 가을날 해거름까지 이 땅에는 무수한 꽃들이 피었다가 집니다. 나는 꽃이 피고 지는 가운데에서 계절의 변화를 읽어냅니다. 개망초꽃이 피어나고 있으니 여름이지, 찌는 듯한 더위와 지루한 장마를 몰고 한 발짝 더 가까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겠지. 꽃들은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며 제 자취를 뽐내나 봅니다. 요 며칠 사이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망초(亡草)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가슴아픈 사연이 담긴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망초꽃이 무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설을 지니고 있는데, 실지로 농사를 짓지 않는 묵정밭에는 개망초가 꽃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황량한 들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농사를 짓지 않는 무슨 말못할 곡절이 있는 것이겠지요.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해 망초꽃이 전 국토로 급속하게 퍼지면서 그런 꽃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나 봅니다.
망초꽃은 참으로 번식력 강한 귀화식물이지요. 길가나 빈터, 묵은 밭을 비롯해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망초꽃은 줄기와 가지 끝에 자잘한 흰색꽃송이가 달려 전체적으로 원추꽃 차례를 이루는데, 꽃송이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흰색 혀꽃이 촘촘히 돌려나고 가운데에는 노란색 통꽃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개화시기는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6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그 절정을 이루며, 개망초, 망초, 달걀꽃 등으로 흔히 불리어지고 있답니다.
내가 개망초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0년 후반입니다. 지금은 이미 농촌이 붕괴되었지만, 그 때에는 농촌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지요. 젊은 사람들이 수지에 맞지 않는 농사를 버리고 도시로 삶터를 옮기면서 날로 묵은 밭이 늘어나게 되었지요. 당연히 그 땅에는 곡물 대신 개망초가 그 자리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지 발길 닿는 곳마다 눈부신 꽃밭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 아픔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끝 갈 데 없이 깊은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던 것이지요. 떠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눈시울을 적셨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떠나고 난 빈자리에는 또 어떤 것이 남아서 그 슬픔을 대신해주는 것이구나. 삶은 저토록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으면서 꽃을 피우며 또 다른 생을 이루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두보의 시가 보여주는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國破山河在), 성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만 무성하구나(城春草木渙).”에서 나는 ‘농촌이 망해도 전답은 그대로요(農破田畓在), 농촌은 여름이면 망초만이 무성하구나(農?亡草渙)’로 패러디 해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작금의 농촌 현실을 이보다 더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하(山河)는 민중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전답일 것입니다. 그 논과 밭에 개망초가 무성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니, 눈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오늘 밤도 그 핏기 없는 살덩이를
별빛 속에 사르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고 사는 걸까
하늘 한번 떳떳하게
우러러보지 못하고 사는 걸까
시궁창보다도 더 어둡고
암울한 이 땅 속에
살과 뼈를 묻고
거친 비바람 헤치며
억만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또 그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꿈과 희망
고뇌와 실의 속에서도
더불어 함께 살아온 이 땅의
참 눈물이면서도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 양문규,「개망초」전문
이 시는 80년대 후반에 쓰여진 시입니다. 개망초꽃에다 민중의 삶을 옮겨놓자고 하였지요. 논밭이 개망초로 덮이는 것은 곧 농민들이 편히 농사를 짓지 못하는 형편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곡물대신 빽빽하게 개망초가 들어서는 들녘의 모습에서 개망초가 슬픔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떠나고 난 자리에 남은 자들의 또 다른 슬픔을 깊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개망초가 괄시와 멸시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누가 저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로 갖은 자들이고, 도시적 삶으로 추정되는 그런 삶들이겠지요.
나는 망초꽃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자 했습니다. 농촌에 남아 있거나, 도시 변두리에 밀려나 삶터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개망초는 서울 사람들, 도시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부터 괄시받고 미움 받으면서 비실비실 살아가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도시 산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온 사람들이지요. 자본의 논리에서 보면 개망초는 혐오와 근절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농사가 돈이 되지 않는 천덕꾸러기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개망초는 가난한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역설적으로 개망초를 민중의 삶 속으로 옮겨다 놓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좁은 의미의 못나고 형편없는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일 수도 있고, 시골서 땅을 잃고 쫓겨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의 삶일 수도 있고, 더 넓은 의미의 민중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주체를 이루면서도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용택은 그의 연작시편「섬진강1」에서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노래했습니다. 이 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농사의 근간을 이루는 강물을 누가 퍼간다고 해도 그 강물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작금의 농촌현실이 그와 같다해도 농촌은 농촌으로 일터로 삶터로 그 생명을 부지할 것입니다. 억만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조상 대대로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더불어 참 세상을 이루는, 개망초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노래할 것입니다.
개망초꽃이 피고 있습니다.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온 국토를 개망초가 뒤덮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삶에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다시 개망초꽃을 노래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 훗날 누군가가 다시 이 땅으로 찾아들어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푸른 물결로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시겠지요. 억만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는 세상 말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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