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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석사,희방사 성지순례

  • 입력 2004.08.14
  • 수정 2024.11.15

이른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4시간을 달려 부석사 입구에 멈춰섰다. 한때 세간의 입에 올르며 극찬을 받던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보기 위해 무리해서 오른 여행길이었다. 아침부터 설쳤던지라 버스 오는 내내 꾸벅꾸벅 졸던 눈을 부비며 따가운 햇살 속을 걷기 시작했다.

 

 

 부석사 입구의 폭포호수는 비록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호수 가장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는 마치 선계로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누가 그랬던가. 부석사는 가을이 멋진 사찰이라고.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의 나열은 어느덧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과 농장이며 복숭아 농장때문인지 성지순례가 아니라 소풍온 기분이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경북 영주와 봉화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봉황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 산은  태백산을 거친 백두대간이 소백산으로 뻗어 내리다가 중간에 위치한 선달산에서 남쪽으로 가지친 지맥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은행나무가 끝없이 반겨주는 길을 따라 끝에 이르니 불법을 지키고 불법에 귀의한 모든 이들을 지키는 두눈 부리부리한 사천왕상이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자 깨끗하면서도 소박한 부석사 도량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름모를 예쁜 여름 꽃들과 풀들이 한창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상상했던 화려한 모습이 아닌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아름다움 이었다. 군더더기도 없고 꾸밈도 없는 깔끔함과 절제의 예술품이랄까. 화려한 단청도 없다. 현판까지 소박하다.

 

부석사라는 이름은 무량수전 뒤편에 위치한 부석(?石)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었다. 상심한 선묘는 불법에 귀의하고 죽어 용으로 변하여 의상이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게 호위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잇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큰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그 바위를 부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 윗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 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은 독특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간의 비율을 감안해 넓어보이게 하기위해 일부러 그리 배치한 것이라 한다. 부석사가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 함이 이해가 되었다.

 

예불을 드리고 완전 자연식과 시원한 수박으로 꿀같이 맛난 점심공양을 한후 서둘러 희방사로 향했다.

 

소백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하차하자 예상치도 않은 등산이 시작되었다. 소백산 국립공원의 야영장 길을 따라 희방사를 찾아가는 길. 30여분을 쉬지 않고 올랐다. 맑고 시원한 계곡 주변으로 가족들이 함께 야영을 하고 물놀이를 즐기느라 한창이었다. 울창한 숲과 예쁜 꽃들로 소백산 국립공원은 잘 관리되고 보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 시원한 폭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희방폭포.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에도 아랑곳 없이 벌써 발빠른 사람들은 떨어지는 폭포수 밑에 자리를 잡고 수박을 깨고 있다. 희방폭포는 높이 28m로 내륙지방 최고의 폭포라고 한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힘찬 폭포수가 만드는 시원한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아본다.

 

 

“이거에 비하면 팔공산 갓바위는 누워서 떡먹기여~”

“봉정암에 비하면 이길이 누워서 떡먹기지요”

“자~ 우리 그럼 떡먹으러 갑시다.”

성지순례에 참여한 불자들이 바위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나누는 이야기에 그날 지도법사스님이셨던 도은스님의 답이 재밌다.

 

 

재촉한 발걸음이 작은 구름다리를 지나니 숲길로 뻗어들어가는 나무계단이 보였다. 마치 숲속 요정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같아 보였다. 촉촉하고 향긋한 숲의 향기가 배어진 공기로 가득 배를 채워본다.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대사가 세웠다.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6.25 때 절과 함께 불타고 얼마 전에 책만이 나왔다. 또 희방사 법당 한쪽에는 영조 18년(1742년)에 제작된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 경북 지방 유형 문화재 226호로 지정된 이 구리종은 원래 충북 단양 대흥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희방사는 호랑이의 불심으로 만들어진 절이라 한다.

두운대사가 소백산 한 토굴에서 혼자 기거하며 수행을 하고 있을 무렵 한 호랑이가 그런 대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라지곤 했다. 어느날 그 호랑이가 동굴 입구에 앉아 입을 벌리고 대사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어 스님이 살펴보니 호랑이 목에 금비녀가 걸려있는게 아닌가. 대사는 금비녀를 꺼내주고 사람을 잡아먹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그 후로 호랑이는 이따금씩 멧돼지나 토끼등을 잡아 동굴입구에 갖다놓고 스님께 공양을 드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스님은 스님이 어찌 육식을 하겠냐며 다시 호통을 쳤다. 어느 봄날 호랑이가 두운대사의 옷자락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대사가 따라가보니 한 아리따운 처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처녀를 열심히 간병하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처녀는 서라벌 한 부호의 무남독녀 외딸이었고 호랑이가 처녀를 납치해온 것이라 하였다. 처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자 부호는 감사의 마음에 소백산 토굴 옆에 오늘의 희방사를 창건하여 드렸다.

 

희방사는 입구부터가 특이했다. 들어가는 입구의 요사채의 창문위에 “희방사(喜方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아담한 사찰이었는데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설법전이 큰 정자와 같이 사방이 뚫려 있었다. 희방사의 돌담에서 놀고 있는 도룡뇽 한 마리가 이곳이 얼마나 깨끗한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곳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부석사, 희방사... 조계사에서 출발할 때 도은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오늘 여러분은 성지순례를 겸해서 아주 좋은 휴가를 보내게 되실겁니다.”

정말 그랬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우리 불교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

이것보다 더 좋은 휴가가 있을까.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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