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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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님께서도 참지 못하신 동지 팥죽 이야기
부산 동래 마하사에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동짓날 새벽이었다. 절집에서는 동짓날 새벽 팥죽을 쑤어 대웅전을 시작으로 여러 전각에 팥죽을 공양하게 되는데, 그날 새벽 따라 공양주가 늦잠을 잤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가보니 아궁이엔 불씨마저 꺼져 있어, 황령산 봉수대로 불씨를 얻으러 갔다. 그런데 봉수꾼이 “조금 전 그 절 동자승이 불씨를 구해 갔는데, 또 꺼졌나요?”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팥죽까지 얻어 잡수시고 갔다는 것이다.
공양주가 부지런히 절 부엌으로 돌아와 보니,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후를 생각할 겨를 없이 공양주는 재빨리 팥죽을 쑤어 대웅전에 팥죽을 올리고 나서, 나한전(羅漢殿)에도 가져갔다. 그런데 세번째 나한님 입 주위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이 팥죽 아닌가.(어떤 분인지 이름까지밝히지 않은 이유는 체면을 고려한 것인 듯.)
공양주는 알게 되었다. 마을로 내려가 불씨를 구하신 분도, 팥죽을 얻어 잡수신 분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준 분도 다름 아닌 바로 그 나한님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한님께서는 공양주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웃고만 계실 뿐...
마하사 나한님의 입장을 정밀하게 분석(?)해 본다.
① 공양주가 피곤한 모양이다. 이 추운 동짓날 부엌의 불씨도 꺼졌는데, 팥죽 쑬 생각도 않고 늦잠 자는 것을 보니...
② 이것 큰일 났네.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에게 팥죽을 올려야 하고, 무엇 보다 나도 어서 어서 팥죽 한 그릇을 얻어 먹어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③ 공양주를 깨울까? 말까? 이것 참 갈등이네...
④ 에라, 절집 일로 고생 많은 공양주는 늦잠을 자게 두고, 불씨는 내가 얻어오자.
⑤ 와, 와, 아랫마을 이 집의 팥죽이 매우 맛있구먼. 주인장, 한 그릇만 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자기 부족들의 집 대문에 양의 피를 칠하게 하여 신이 내리는 대재앙을 면하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원형적인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집안 및 동네의 큰 나무 등에 피를 뿌려 사귀(邪鬼)의 침입을 막는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화에는 상대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살생의 피 냄새를 끼치는 잔인한 풍습들이라 할 것이다.
반면에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은 생전에 팥을 몹시 두려워하였기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이를 물리친다 하였다. 한편 다른 전승들에 의하면 사당에 제사를 지낸 다음 팥죽을 문간에 발라서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였다. 불교 의식에 있어서도 점안식(點眼式)을 행한다거나 구병시식(救病施食) 등에서 귀신을 쫓는 의미에서 팥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피 칠’하는 풍습들과 비교해 보면 무엇인가 차원이 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팥죽을 얻어 잡수신 나한님’의 이야기에서는 따뜻한 인간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공씨 이야기, 불교의 의식 등에서는 귀신조차도 가능한 한 ‘처참하지 않은 방법’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동지가 되면 태양은 죽음을 맞이하고 재생한다. 밤이 최고로 긴 동짓날은 뒤집어 생각하면 최고로 짧아졌던 낮이 점차 길어지는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이 날은 태음(?陰)의 상징인 노인과 소양(小陽)의 상징인 어린이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동지는 가득 참과 완전한 비움이 하나로 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그 동지의 상징적 의미를 아셨기에 마하사 ‘나한님’께서는 그다지도 동지 팥죽을 맛있게 드셨던 것은 아닐까? 성불하시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작은 설(亞歲. 혹은 兒歲)’이라 불렀다. 어렸을 때 부른 정겨운 노래가 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작은 설로 여긴 동지. 옛날 궁중에서는 동짓날을 원단(元旦)과 함께 으뜸가는 축일로 여겨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으며,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였다. 또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국왕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이날에는 새해의 달력을 주고받는 풍습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이날 관청에 황장력<黃粧曆>과 백장력<白粧曆>을 올린다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으로 하선동력(?扇冬曆)이라 하여 단오에는 관원이 아전들에게 부채를 나누어주며, 동지에는 아전이 관원에게 달력을 바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각기 ‘시원한 행정’과 ‘질서 있는 정치’의 품격 높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밖에 고려 ·조선 초기의 동짓날에는 어려운 백성들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동짓날의 최고 매력은 역시 팥죽이리라.
팥은 빈혈과 변비, 각기병과 신장병 등에 이로운 곡식이다. 팥을 깨끗이 씻어 삶고 팥물을 걸러둔다. 팥물의 앙금이 가라앉으면 웃물만을 따라내어 끓이다가 불린 쌀을 넣고 죽을 쑨다. 예로부터 동짓날 민가에서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면서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넣는다. 이 새알심은 맛을 좋게 하기 위해 꿀에 재기도 하고, 시절 음식으로 삼아 제사에 쓰기도 한다. ‘알’은 바로 새로운 탄생의 의미 아닌가?
본래 절집에서는 법화경 강독을 마치고 전통적으로 팥죽을 나누어 먹는데, 금정산 범어사 동산 스님께서는 대중들과 함께 팥죽을 즐기셨다고 전한다. 우리 조계사에서도 매년 동지에 팥죽을 쑤어서 모든 대중들과 함께 ‘나눔의 행사’를 하고 있다.
부산 동래 마하사의 이야기가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모르지만 나한님의 넉넉한 성품과, 어쩌면 천진난만하다고 할 천진불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천지가 눈으로 덮인 한 겨울의 깜깜한 동짓날 밤, 절집의 나한님께도, 성철 스님 식의 표현으로 ‘노숙하시는 부처님’께도 팥죽 한 그릇 올리는 정성은 어떠할까.
그러면 ‘와, 팥죽이 엄청 맛있소. 보살님, 거사님, 몇 그릇만 더...’하시지 않을까?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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