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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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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호국불교의 현장 남한산성

  • 입력 2005.12.19
  • 수정 2024.11.24

벽암대사(碧岩?師) 각성(覺?)스님이 도총섭(都摠攝)되어 8도의 승군 동원 숙식과 훈련위해 9개의 사찰 창건

 

지난 11월 2째주 일요일 지하철5호선 마천역에서 모인 도반들이 남한산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 보다 1시간이나 지난시간이다. 일부 도반이 상일역으로 갔기 때문이다. 5호선이 도심지를 지나 강동역에서 마천가는 노선과 상일가는 노선이 갈라지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수호장대에 도착하여 잠시 둘러보는데 도반 한사람이 마천역에 도착 했다. 합류하기 위해서는 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시간에 남한산성 공부 좀 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스님들이 맡아 하였다. 산성내에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僧軍)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佛徒)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벽암대사(碧岩?師) 각성(覺?)스님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井寺) 외에 개원사(開元寺)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柱寺) 동림사(東林寺) 동단사(東壇寺) 등 7사(寺)가 추가로 창건되어 산성내 9개의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그 외 사찰은 후에 복원 되거나 흔적만 남아 있다. 산성곳곳에 쌓아올린 석축, 돌무더기 기와 하나 하나에 스님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음을 생각하니 굴러다니는 작은 돌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게 보인다.

 

땀은 다 식어서 으슬 으슬 한기를 느낄만한 시각에 서문에서 합류한 도반들 산성을 따라 이동 장경사를 목표로 산성언덕을 두어 개 넘었을까. 한 도반의 손 전화가 울린다. 친구분이 망월사 주지스님(성법스님)을 찾아뵙기를 권유하는 전화다. 고개하나를 남겨두고 우회전  발길을 돌려 망월사를 향한다. 그러나 주지스님께서 몸이 많이 불편하시어 접견이 불가하다는 전갈을 받고 경내를 돌아보고 대웅보전에서 예불을 올렸다.

 

 

망월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 태조(?祖)가 한양에 도읍을 세울 때 서울의 장의사(莊義寺)를 헐은 뒤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 금솥 등을 이 절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단지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함께 의병들의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의병 본거지가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1986년부터 성법스님(77)께서 부지를 구입하고 1989년부터 망월사를 복원하기위한 대역사를 시작한 이래 각종 어려움이 있었으나 불교교육의 성지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로 극복하면서 한진 그룹의 도움과 성법스님의 강의료, 원고료, 집필 작업에서 얻은 인세 등으로  불사를 이뤘다고 한다.

 

현재 망월사는 조계종 비구니수도원으로 등록 운영되고 있으며 성법스님이 인도간디총리로부터 직접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한 13층 사리탑이 웅장하다.

 

망월사를 나서니 오후 4시 산성의 어두움은 일찍 찾아온다. 서둘러 하산하였으나 어두움이 뒤덮인 시간이 되어서야 마천역에 도착하니 오늘의 성지순례 및 등산은 이렇게 마감했다.

 

 

남한산성을 다시 찾은 것은 12월 18일(일요일) 지난 11월 성지순례 때 3개 사찰을 다녀보기로 계획 했으나 시간계획의 차질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한 것을 지면으로나마 소개하고자 해서다.

 

오전11시30분 남한산성 동문에 이르니 장경사 가는 길에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다 경사도 도 만만치가 않다. 4륜으로 조정한 자동차는 굉음을 이르키며 조금씩 언덕을 오르기 시작 했다.

 

산길을 한 구비 돌았는데 산길에 눈이 없는 것이다. 비질을 한 깨끗한 도로가 다가와 기쁜마음으로 구비 구비 돌아 장경사 일주문에 다달 으니 스님(해광 스님) 한분이 눈을 치우고 계시는지라 비 자루를 들고서 일주문부터 대웅전까지 눈을 쓸어 황토색 길을 여니 등에서부터 땀이 흠뻑 고인다. 스님께서 차를 한잔 만들어서 주신다. 예를 올리고 감사히 차를 마시고 스님께 이것 저것 여쭈워 보았으나 말씀을 많이 아끼신다.

 

 

장경사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의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守城)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바로 산성의 중심 되는 위치에 개원사가 있다.

 

개원사 천왕문에 “이곳은 마음을 가다듬고, 몸과 입과 뜻을 바로 하는 곳 입니다.” “관람하시는 동안 침묵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신다면 보다나은 내일을 위한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벌과 나비가 꽃에서 꿀을 취하되 꽃에는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고 화분을 매개하여 결실을 도우 듯”~~~ (서로를 위한 삶의 대중 일동)

 

한동안 생각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문구다. 조용히 참배를 하고 개원사를 나섰다.

 

 

개원사

 

1989년 12월 29일 경기도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개원사는 조선 1624년(인조 2)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僧徒)들을 총지휘하는 본영 사찰(本營寺刹)로 창건되었다.  각성(覺?)스님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병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주둔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井寺) 외에 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寺)·장경사(長慶寺)·천주사(?柱寺)·동림사(東林寺)·동단사(東壇寺)가 더 창건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될 때까지 370여 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 온 호국사찰로 번창하였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규정소(糾正所)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을 하였다.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남한산성일대의 현존하는 4개의 사찰 중 국청사를 제외한 망월사, 장경사, 개원사를 순례하였다. 각 사찰의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였다. 참고사항으로 활용하시기 바람에서이다.

 

조계사 예비기자 김종호 (건법)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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