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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정암사(?巖寺) 참배

  • 입력 2006.02.09
  • 수정 2024.11.26

불기 2550년 2월 7일(화)에 약 180 여명의 조계사 신도분이 여공스님(호법국장스님)과 재경스님(포교국장스님)의 인솔하에 강원도 정선군에 소재해 있는 적멸보궁 정암사를 참배하였다. 원래는 정암사와 함께 법흥사도 참배할 예정이었으나, 눈이 많이 내린 관계로 법흥사는 방문하지 못하였다.

 

정월보궁참배는 정월에 5대 적멸보궁들을 참배하는 행사를 말한다.

적멸보궁이란 간단히 말하면 부처님의 영원한 열반을 상징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진 곳을 말한다. 여기서, 적멸(寂滅)이란 말은 고대 인도어 산스크리트의 nirvana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통상 사용하는 열반(涕槃)이란 말은 이 말을 소리대로 적은 것으로 적멸과 같은 말이 된다. 따라서 적멸보궁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항상 머물러 계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말이 된다.

한편 사리는 진신사리, 법사리, 승사리의 3종류를 보통 든다. 진신사리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화장을 한 뒤 거두어진 유골,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이다. 법사리는 대장경을 가리키고, 승사리는 출가수행자가 열반한 뒤 거둔 유골을 말한다. 이 가운데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 진신사리가 정암사에 모셔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원이 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열반에 들자 그 유골을 여덟 부족이 나누어 각각 탑을 세워 안치했고, 그 나눔을 중재하면서 사리의 양을 달 때 쓰였던 병 혹은 단지와 남은 재를 모아 다시 두 개의 탑을 만들어, 부처님 입멸 직후에는 모두 열개의 탑이 건립되었다.

 

그 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 때 이 여덟 개의 탑 가운데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탑을 모두 열어 전국에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 한다. 이후 사리는 중앙 아시아, 중국, 우리나라, 일본으로 퍼져 수많은 탑이 세워지게 된다.

 

이런 과정과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리가 들어온 것은 신라 진흥왕 10년(549)이었다. 그러나 사리를 우리나라에 들여와 사리 신앙과 불교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자장스님이었다. 스님은 선덕여왕 12년(643)에 부처님의 정골(頂骨), 불아(佛牙), 불사리 100과(顆), 부처님이 입으시던 가사(袈裟) 등을 들여와서 황룡사 구층탑, 대화사탑, 통도사 계단(戒壇) 등 각지에 나누어 모셨다.

 

이 자장스님에 의해 사리가 모셔진 현존하는 다섯 군데의 적멸보궁, 곧 경남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중대,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를 일러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이들 적멸보궁은 모두 법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그 뒤편에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나 계단을 두고 있다. 이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가장 먼저 모셔진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또 그 사실이 문헌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그 밖의 적멸보궁과 격을 달리하는 대접을 받으며, 오늘날도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에게 성지요, 순례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정암사는 특히 적멸보궁을 창건한 자장스님이 만년을 보내고 열반에 든 곳으로 다른 네 곳과는 또 다른 뜻이 깃들어 있다.

 

정암사는 신라의 자장법사가 이 곳에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여 비로소 사십팔방지처(四十八房之處: 수행처, 사찰을 뜻한다)를 열었으니,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으므로 정암사(?巖寺)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암사가 처음 창건된 때를 정암사 사적은 정관 19년(645)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자장스님에 의한 정암사 창건을 분명히 언급하면서도 그 연도는 밝히지 않고 있다.

 

오늘날 정암사는 적멸궁(寂滅宮) 수마노탑(水瑪瑙塔) 일주문(一柱門) 육화정사(六和精舍), 관음전(觀音殿), 극락교(極樂橋), 범종각(梵鐘閣),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자장각(慈藏閣)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적멸궁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수마노탑이다. 정암사 적멸궁은 여느 보궁이 적멸보궁 네 글자를 현판에 올린 것과 달리 여기서는 적멸궁(寂滅宮)이라는 세 글자만이 현판에 적혀 있다. 정암사 적멸궁은 어느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고 있다. 사방의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은 법화경 여래 수량품의 게송 열두구절이 적혀 있다.

 

한편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정암사의 상징이자 정암사를 대표하는 탑이다.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쌓은 7 층석탑이다. 따라서 탑양식상 모전 석탑에 속한다. 적멸궁 뒤 산 중턱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이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께서 귀국하실 때 서해 용왕이 용궁으로 모시고 가서 주신 마노석(瑪瑙石)으로 탑을 쌓은 것이라 하여 수마노탑이라 한다. 그리고 이 탑안에 자장스님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했다고 전해 오는 까닭에 정암사가 적멸보궁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1972년도에 수마노탑의 중수가 이루어질 때 탑의 각 부에서 다섯 매의 탑지와 사리 장치가 발견되어 불자들의 찬탄과 세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정암사에는 극락교와 적멸궁 사이에 죽은 가지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가운데 주목 한 그루가 자라는 둥근 석단(石壇)이 있다. 자장스님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돋아 오늘까지 푸르게 살아 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 정암사에는 자장법사와 문수보살 서해용왕이 함께 얽힌 내력이 담겨 있어 더욱 이채롭다. 신라에는 왕손인 무림공(武林公) 김씨의 아들 자장이 있었다. 신라의 제 27대 선덕여왕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재상을 삼고자 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장스님은 불법을 구해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후 오대산의 동대(東坮)에 나아가 수십 일동안 좌선,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는데,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묘법을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북대(北坮)로 문수보살을 찾아보시오”라고 말했다. 그 즉시로 북대의 운제사(雲際寺)로 가 제석천이 세운 문수보살상 앞에서 삼칠일간 정진하였다. 그러자 범승이 나타나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준다.

 

분명히 알라, 모든 법이

그 바탕은 본디 없어라.

이와 같이 법의 성품 이해한다면

바로 노사사불을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無所有

?是解法?

卽見盧遮那

 

이와 같은 게송을 들려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 게송보다 나은 것이 없소”라고 덧붙였다. 이어 비단 바탕에 금실로 수를 놓은 가사(袈裟) 한 벌, 패엽경 다섯 점,전신사리(全身舍利: 다보여래와 같이 부처님 몸 전체가 사리인 것) 100매, 부처님 정수리뼈, 손가락뼈, 치아 그리고 염주 등을 전해주며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세존의 신물(信物)이니 삼가 보호하였다가, 스님이 본국에 돌아가거든 삼재가 닿지 않는 명승처에 낱낱이 나누어 모셔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편안케 하기 바랍니다. 그대를 태백산 삼갈반처(三葛盤處)에서 다시 보겠소” 이 말을 마친 뒤 홀연히 그 자취가 없어졌다.

그 후 당의 승려들은 귀중한 보배들이 타국으로 옮겨감을 시기하여 병사를 동원하여 이를 빼앗고자 하였다. 스님이 그 음모를 미리 알고 몰래 서해에 배를 띄우자, 서해 용왕이 스님을 용궁에 맞아들여 공경히 예배하고 공양올리며, 이어서 무수한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실어 울진포까지 운반한 뒤 신통력으로 태백산에 갈무리하여 장차 불탑을 세우고 고치는 데 쓸 보배가 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한편 조계사 정월보궁참배는 2월16일(목) 상원사, 월정사 및 2월 22일(수) 통도사 등으로 추가로 예정되어 있다. 참가 문의 : 신도회 사무처 02-732-2187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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