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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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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절이 마을에 산다.

  • 입력 2007.07.13
  • 수정 2024.11.22

성지순례 - <전북 완주 송광사>

 

 

<이웃집 마실 가 듯, 찾아 가는 절>

절은 산에 살아야 제격이다. 맥 놓고 스적스적 산길을 올라 한 참, 숨이 가파 오면 노송에 등 기대 땀을 훔치고, 다시 고샅길 돌면, 저기 운무에 갇힌 산사 하나, 비로소 산문(山門)의 빗장이 열리고 골골마다 메아리지는 낭랑한 고승(高僧)의 독경소리, 목탁소리를 무심하게 들으면 청정으로 세심(?心)으로 저도 모르게 합장하며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고픈 곳, 하여 절은 산에 살아야 제격인 것이다. 그러나, 완주 송광사는 마을에 산다. 저녁을 먹고 옆집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주갑이 아재도 뒷짐지고 마실 가듯, 이웃집 가듯,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가 삼촌에게 용돈 달라는 조카마냥, 덩치가 크신 부처님에게 떼를 쓰며 기복(祈福)을 발원한다.

 

완주, 소양면 대흥리, 구멍가게가 있는 사거리 양회다리를 건너 언제 쯤 심었을 까,

제법 나이가 든 벚나무 터널을 4~5백 미터 걸어가면 불현듯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절, 송광사다.

 

 

 

일주문(一柱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호다. 온갖 번뇌망상을 여의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들어설 수 있는 일주문은, 원래 남쪽으로 3㎞ 지점인 나드리에 있던 것으로 당시 송광사의 사세를 알려 주는 지표로 삼고 있다.

 

 

 

금강문(金剛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3호다. 금강과 같은 단단한 지혜로 번뇌 망상을 제압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두 번째 문이다.

 

 

 

대웅전(?雄殿)

보물 1243호다. 대웅전에는 국내 최대 크기의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목패, 천장에 주악비천도 11폭이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초창기에는 2층이었으나, 1857년도에 1층으로 중창되었다. 현판은 조선시대 서예가이며 선조임금의 아들인 의창군 이광의 필체로 조각되었다.

 

 

<나라에 큰 일 있으면 부처님이 땀과 눈물 흘려...>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년), 보조체징(普照體澄)선사가 창건한 선종의 대표적 사찰이다. 옛날에는 백련사라 하였으나,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의해 송광사로 사찰명을 바꾸었다. 일주문이 3km나 떨어진 전주-진안 도로변에 있었다고 하니 가히, 가람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폐찰이 되었다가 광해군 14년(1622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인조 때 마무리 하였으며,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孝宗)이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자 무사환국과 국난의 아픔을 불력(佛力)으로 치유하고자 송광사를 호국원찰(護國願刹)로 삼아 당대의 최고 승병대장 벽암각성 대사와 덕림, 홍신 등, 160여명의 승려를 머물게 하여 거국적, 복원불사를 하였으며, 선종대가람사(禪宗?伽藍寺)라는 사호(寺號)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 후,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진묵스님을 법사로 화엄법회 50일을 열어 대웅전 삼세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을 점안하고 승려 700여명을 주석시키기도 하였으며, 많은 영험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마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불상이 땀과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특히 대웅전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미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현, 그리고 1997년 12월2일부터 13일까지 눈물과 땀을 엄청나게 흘려 IMF한파를 예견하는 이적을 보이기도 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좌불상은 국내 최대이며 대웅전은 보물 1243호이고, 유일한 아(亞)자형 종각은 보물 1244호로 학이 땅으로 사뿐이 내려 앉는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전 부처님

보물 1274호다. 국내 최대 크기의 소조 좌불로써, 부처님의 가호로 부국강병과 나라의 안녕, 중국에 볼모로 끌려간 두 분의 왕자가 무사귀환하기를 발원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진묵스님께서 점안하신 것으로 유명하며,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이적을 보이는 부처님이다.

 

 

 

목패 (木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0호다.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국내 최대의 목패 3위가 남아 있다.

크기와 조각의 섬세함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목패다.

 

 

 

亞자형 종각

亞자형 평면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짜 올린 2층 건물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건물인데 비하여 여기서는 보궁에 즐겨 쓰는 특수한 평면형식 즉, 亞자형을 택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위층은 마루바닥에 계자각난각을 두르고 계단 쪽만 개방하였으며, 아래층은 흙바닥이며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종·북·목어·운판을 걸어서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다. 칸 사이는 모두 똑같이 8.15자(2.5m)로 소규모인데, 내외 3출목 포작을 주두 및 보간에 1구씩 짜 올려 빈틈없이 지붕을 받게 하였다.

 

건물 크기에 비하여 공포대가 크고 화려해 보이는 반면,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하여 세부는 섬약해 보인다. 겹처마 밑의 서까래와 부연 또한 다른 건물에 비해 가늘고 섬세하다.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 곡선은 이 건물이 누각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2층 내부의 천정은 네 귀에서 짜 올라간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내부 천정 가구는 대들보 없이 창방이 대신 대들보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단청은 모로 단청이며, 내부 기둥 4개에는 용을 그려 장엄하고 창방의 계풍에도 수목화초를 그리고 있다. 이 건물에 걸려 있는 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1769년 (영조 45)에 중수되기도 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쳐 지은 시기인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완주송광사종루」라는 이름의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하늘을 날으며 부처님께 소리공양을 올리는 주악비천도(?樂飛?圖)>

또한, 주목하여 관찰해 보아야할 것은 대웅전 천정에 하늘을 날으며 부처님께 소리공양을 올리는 주악비천도(?樂飛?圖)이다. 11폭으로 조성되어 있는 비천도는 전면에 7점, 그리고 좌우 천장에 각기 2점씩 그려져 있다. 목판 5장∼7장을 대고 그 위에 채색을 하였으며, 이들 11명의 비천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공양을 올리고 있는데, 각종 악기와 옷차림, 춤사위는 조선후기 음악과 무용,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 누구에 의해 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소리와 춤사위의 고장 전북의 상징물로 주목받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과 2001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캐릭터 및 팬시상품으로 개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천무당무(飛?巫堂舞) 

불교가 도래하면서 민속신앙을 수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는 무속춤이 불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떤 무속무인지는 모르지만 무속의 복식을 갖추고 춤을 추는 장면은 드문 경우이다. 보관은 관모와 형식이 비슷하고 모자에 달린 장식이 신분을 봉준 것으로 보인다. 발에 버선을 신겨 춤 공양임을 강조한다. 의상도 지극히 단조로운 무복을 입고 있어 비교적 가벼운 모습으로 처리되었다. 표현에 있어서 매우 가늘고 가벼운 철선을 사용하였는데 운필은 빠르고 날렵하게 처리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끝이 고기나 용의 꼬리처럼 상징화되어 있다.

 

 

 

천도헌정무(?桃?呈舞) 

인체의 구성이나 인물 전체의 형태가 안정되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정리되어 매우 단정하다.

의상의 장식이 거의 생략되어 단순하여 오리려 웅장한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운필은 거침없는 필치로 정리되었는데, 그 가느다란 필선이 유연하게 타고 흘러내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들어있는 세선에 빨간색과 녹색으로 크게 잡은 화면들이 강렬한 대비를 가져와 더욱 시각적인 웅대함을 보여 준다. 천도는 도가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서 사실적으로 글진 것이 아니라 여성의 가슴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의 구성이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기도 하고 긴장을 유도하기도 하여 생기가 살아나는 모습이다. 옷자락 끝단을 굵고 강한 검정 띠로 마무리하여 인물이 단순하나 강렬한 인상을 더하고 있다. 

 

 

 

비천비상무(飛?飛翔舞) 

춤을 추어 여래에게 부처님께 공양하는 남성적인 여성이다. 휘날리는 천의와 뛰어 오르는 몸 동작이 하나가 되어 매우 힘이 넘치고 율동이 돋보이고 동세의 포착이 뛰어난 작품이다. 삼각형 모양의 고깔 형태에 세 개의 날개를 꽂은 독특한 보관을 쓰고 있다. 무장한 신군처럼 강조된 보다 화려한 모자와 의상은 조선후기 불화 중 신중도에서도 비슷한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허리에는 호리병을 차고 발에는 단순한 모양의 비단신을 신었고 어깨에서 늘어뜨려진 띠가 두 번 묶여져 있어 민속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의습의 선은 날카롭고 딱딱한 선이 많고, 옷 주름을 따라 음영을 넣은 것이 깊고 넓게 처리되어 면처럼 구별되어져 있다.

 

 

 

비천바라무(飛?婆羅舞) 

구성이 복잡하고 의상표현과 천의의 묘사가 날카로운 각이 많아 딱딱한 형상을 하고 있다.

유연성이 한결 떨어지지만 바라 앞으로 휘날리는 천의가 둥근 원을 그리며 날리는 모습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색채는 변화가 적고 대체로 붉은 빛깔의 의상을 하고 있으며 허리끈에는 호리병이 매달려 있다. 옷자락 끝부분과 중간에 날카로운 톱날 같은 돌출이 있어 특징적이다. 의상처리가 독특하여 다른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며 묵선도 훨씬 속도감이 느려 굵고 변화 없는 의습 선이 딱딱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설채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선묘와는 달리 우리는 기법으로 정리하여 다소 매끄럽고 부드러운 인상을 내고 있다.

 

 

비천타고무(飛?打鼓舞) 

북을 길게 어깨에 메고 양손에 화려한 북채를 드는 비천상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구성이 돋보인다. 천의가 넓고 강하게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무겁고 웅장한 기분을 준다. 중국 귀부인의 것과 비슷한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석이 엮어진 머리 묶음줄이나 관신이 단순한 듯 하면서도 화사함을 드러내고 있다. 얼굴 양 볼에 연지를 발랐으며 천의의 굵고 강한 검정색 선과 파도문양의 옷자락이 다른 의습의 가는 선과 허리띠의 가느다란 선들과 강한 대비를 보여 주어 인물을 화려한 구성미가 돋보이게 한다. 옷 주름을 보여 주는 색채의 농담과 우림이 요철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북채를 잡고 있는 오른 손의 묘사가 부적절하여 부분적인 무관심으로 보인다.

 

 

비천장고무(飛?杖鼓舞) 

유연하고 여유로운 자세와 힘을 내고 있다. 얼굴이 어린 동자상을 하고 있으며 구성이 한결 단순화되었음이 눈에 띈다. 인물의 자세가 매우 극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반면에 부분 묘사는 대수롭지 않게 처리되어 한결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쌍계사의 신중도에서와 같이 장고를 들고 군관모자 비슷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 화려한 의상에 화련한 장식을 하고 있으며 동자의 무복에 맞게 휘날리는 천의는 많이 생략되었다. 따라서 단조로우며 반면에 춤추는 모습에 힘을 느끼도록 강조하고 있다. 묵선이 힘있게 찍어 내린 변화에서도 색다른 묘법이며 힘과 유연함을 함께 보여 주는 좋은 표현이다.

 

 

 

비천승무도(飛?僧舞圖) 

의상이 단조롭고 꾸밈이 별로 없어 묵선이 강조되어 오히려 색채보다 선에 의해 그림이 결정 되어 있다. 매우 빠르고 자신있는 필치가 비천의 자유로운 리듬을 타고 짧은 순간에 그려 간 듯하다. 온몸을 대나무에 매달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자세는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의 자세를 보인다. 주름진 얼굴에 입술을 빨갛게 발라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수체의 묘법으로 묵선을 날카롭고 힘차게 내리긋는 방법을 사용하여 유연성은 떨어지나 붓질의 힘에 의해 매우 단단한 작품성을 발휘하며 비수법을 충분히 살려 내는 채색법까지 사용하였다.

 

 

법문하시는 주지 도영스님

 

 

“처음 송광사에 왔을 때 대웅전은 쇠락했고 가람배치는 엉망이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들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말이 아니었지요. 송광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포교원장 소임을 맡는 바람에 욕심껏 불사를 하진 못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절을 가꾼 덕에 지금은 찾는 사람들마다 절이 참 고와졌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인용:정경뉴스)

 

'지금 세상은 물질만능주의, 자기중심주의 시대인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석가모니 사상을 잘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함께 더불어 잘살기 위한 사상입니다. 나를 낳아 준 사람이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길러 준 것은 많은 중생과 자연과 더불어서 태양이 나를 길러 주었고, 물이 나를 길러 주었고, 내가 나를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항상 자연과 환경에 대한 것이나 모든 중생들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그런 진리를 잘 지켜 나가기 때문에 대립적인 상황으로 나아가질 않아요. 불교국가에서는 전쟁이 별로 없지요. 공원 같은 아름다운 절 종교를 초월하여 누구라도 지쳐 있는 마음을 쉬어 가고 괴로움을 씻어 갈 수 있는 송광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주지 도영스님은 말씀하신다.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일을 통해서 가장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지혜를 끊임없이 발휘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즉,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의 흐름 속에 끌려가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천국 같은 삶을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을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의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라는 법문 한 말씀 - 총총...

 

나한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2호)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 16 나한과 500 나한을 모신 법당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끌기 위한 법당이다.

 

 

 

저 보살님은 무엇을 그리 서원할까? : 장엄한 미륵 부처님

 

 

 

삼성각

 

 

 

요사체 (첨성각)

 

 

송광사 가는 길.

전주에서 진안 방향 26번 국도 -> 소양면 경유 -> 마수교에서 좌회전 -> 벚꽃터널을 지나면 -> 왼쪽으로 송광사 (도로 표지판이 잘 되어 있음)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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