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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세시명절과 불교이야기 ⑨ - 칠석

  • 입력 2007.08.13
  • 수정 2024.11.23

8월은 한여름을 상징하는 달로 열대야와 무더위를 피해 대부분 피서를 가는 여름휴가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절기상으로 보면 더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말복이 있어 한여름임을 상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을의 문턱임을 알리는 입추(立秋)와 처서(處暑)가 함께 있어 성하(盛?)의 기운 속에서도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명절인 칠석(七?)과 백중(百衆)이 있어 입추, 처서, 말복과 더불어 그야말로 절기명절의 잔칫상이 벌어진 푸짐한 명절의 달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세시명절에 대해 다루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지면사정상 칠석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칠석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전래된 명절이라는 설 등이 있는데 어느 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중국의 세시기인 「형초세시기」에서 견우직녀 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평안남도 덕흥리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와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왕후와 함께 칠석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기념하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칠석을 대표하는 풍속으로는 길쌈과 명다리, 그리고 칠석불공을 들 수 있습니다.

길쌈은 예전의 아낙들에게는 반드시 익혀야 할 필수적인 생활기술이었기에 이를 잘하고 못하는 바에 따라 여자들의 자질을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면 누구나가 길쌈질을 잘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길쌈의 신으로 상징되는 대상이 바로 직녀(織?)이었기에 칠석을 맞이하여 천상의 직녀에게 걸교(乞巧)의 기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걸교는 곧, 길쌈질과 바느질을 의미합니다. 음력 7월을 달리 교월(巧月)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길쌈과 관련해서 삼국유사에 보면 추석의 원형인 ‘가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유리이사금 때 왕녀들을 대장으로 하여 여인들을 양진영으로 나누고 7월 보름부터 추석인 8월 보름까지 한 달 동안 길쌈을 하여 그 우열을 가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길쌈에 대해 중요시 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시합의 시작을 길쌈의 달인 음력 7월에 시작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풍속으로는 무속의 명다리와 불교의 칠석불공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칠석을 맞이하여 자손들의 무병장수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원래 무속의 기원이 오래되었으나 불교에서도 교화차원에서 이를 수용하여 칠석 불공이라 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간혹 치성광여래를 모시고 있는 칠성각에 무당들이 와서 인간수명을 상징하는 무명실타래를 올려놓고 치성을 드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칠석불공의 연유를 짐작케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칠석불공은 칠성각의 본존이자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치성광여래와 좌우보처인 일광 ․ 월광보살, 그리고 주요 별자리를 상징하는 28수(宿)에게 무병장수를 비는 칠성불공(七星佛供)을 말하는데 원래 정월 7일에도 이 같은 불공을 드렸으나 민간에서는 주로 음력 7월 7일 칠석을 맞이하여 드렸다고 하여 칠석불공이라고도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칠석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를 앞둔 유생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울의 경우에는 인왕산 칠성암에서 칠석날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에 따라 많은 유생들이 그리 했다는 기록이 있어 칠석날의 재미있는 풍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남쪽지방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갈 때 추풍령이나 죽령을 넘지 않고 가파르기로 이름 난 문경새재를 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시험에서 추풍낙엽이 되거나 대나무처럼 미끄러지지 말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니 평소에는 무속과 불교를 정색으로 비판하던 선비들도 시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오늘날에도 대입시험이나 고시 등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자들이 영험이 있는 기도처를 찾아 정성을 드리는 모습이 과거와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칠석 무렵의 풍속으로는 폭서(曝書)와 광의상(曠衣裳)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오랜 장마로 인해 습기로 눅눅해진 책과 옷가지를 햇빛과 바람에 말리는 것을 말합니다.

칠석을 대표하는 설화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견우직녀설화가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직녀에 관해서는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직녀가 하늘의 선녀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평범한 인간의 딸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하늘의 임금(?帝)인 옥황상제의 딸이거나 혹은 손녀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서왕모(西?母)의 외손녀라고 하는 등 다양한 변형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 우리가 잘 아는 나뭇꾼과 선녀 설화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녀(織?)는 천제(?帝)의 손녀로 은하(銀河)의 동쪽에 살면서 다른 선녀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옷을 짓는 베를 짰다. 은하(銀河)를 사이에 두고 인간 세계에는 견우(牽牛)라는 목동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형수의 모진 학대를 받다가 늙은 소 한 마리와 함께 쫓겨났다.

 

견우는 이에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늙은 소 한 마리에 의지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소가 말하길 직녀와 다른 선녀들이 은하에 목욕하러 올 터이니 목욕하는 틈을 노려 직녀의 옷을 감춰 두면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견우는 소가 일러 준 대로 목욕하러 내려온 직녀의 옷을 몰래 집어 왔고 결국 직녀는 견우의 아내가 되었다.

 

이들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행복하게 살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천제의 진노를 사서 직녀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지상에 남겨 두고 하늘나라로 붙잡혀 가야만 했다.

 

슬퍼하는 견우를 본 늙은 소가 다시 말을 하길 나는 이제 곧 죽게 되니 내 가죽을 벗겨 그것을 걸치면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견우는 늙은 소의 말대로 가죽을 벗겨 몸에 걸친 후 두 아이와 함께 직녀를 찾아 나섰다. 이윽고 직녀를 발견한 견우와 아이들이 가까이 가려하였으나 서왕모가 은하를 깊고 거대한 강물로 만들어 이들을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 마침내 천제(?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래서  매년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한 차례씩 둘이 상봉(相逢)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고 이 때 수많은 까치들이 날아와 깊은 강물 위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 이들 부부는 까치들이 놓은 다리를 건너 부부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만남의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인간세상에서는 칠석날 내리는 비라 하여 칠석우(七?雨)라고 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야기와 조금 다른 점은 있지만 지극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칠석을 기념하는 풍속이 희미해지는가 싶었는데 최근 들어 절에서 칠석을 맞아 청춘남녀들의 건전한 만남을 적극 주선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21세기형 칠석맞이가 아닌가 싶어 흥미롭기만 합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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