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법회행사

49재 이렇게 해석합니다

  • 입력 2022.12.19
  • 수정 2024.11.22

의식의 한글화 및 정체성 확립 시급  

 

과거 여법한 49재(齋)나 천도재(遷度齋)는 부자나 봉행한 법회였다. 그러던 49재가 빈부의 차이를 넘어서 일반화 된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원경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행사나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매도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49재는 6세기경 중국에서 유교의 조령숭배(祖靈崇拜)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사상이 절충되어 탄생한 것이라 전해지며, 과거 우리나라에서 수정보완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의식 진행과 내용편집은 가히 천재의 작품이라는 감탄이 절로나온다.

 

근래 49재는 타종교계도 지내며, 개신교 신자로서 자살한 모 유명 탤런트도 49재일에 동료들이 묘소를 찾아 헌화 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필자의 유년시절 49재는 저녁예불과 같이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예불을 끝으로 회향했다. 기억으로는 쌀 한가마니 값이면 충족했고, 두가마니 값이면 연화대를 새로이 조성하고 49개의 등을 밝혔다. 준비에만 3일 이상 걸렸으니 그야말로 명품 49재였다. 

 

49재 의식은 그 편집된 의도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을 했다면 불교의 진수를 맛본자가 만인을 위해 만들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生死一?)며, 부처와 중생이 무차별함에 도량(法堂)에서 ‘죽은 자와 산자’ ‘극락과 지옥’ ‘부처와 중생’ 자체를 논함이 다만 현상으로 아직 미혹하기에 이해를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 우선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영가 - 죽은자 - 와 살아있는 재자 - 우리모두 -를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일체(一體)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들은 한마음(一心)이기에 일체의 분별과 차별을 불허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만 49재의 바른 이해와 어떻게 49재를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가능하다.

 

필자의 49재에 대한 견해는 ‘ 죽은 자(靈駕)가 살아있는자(齋者)를 깨우쳐 주는 방편으로서 보살행 또는 죽은 자와 산자가 동시에 49일간의 단기출가 하는 수행의식’ 이라 정의하며, 이렇게 해석해야만 불교적이라 단언한다.

 

49재(관음시식)의 그 시작(시련절차)과 끝(봉헌)의 전 과정의 유기적 짜임새와 의미하는 바, 각 단락의 내용을 세세히 연구해야함은 너무나 지당하다.  두 시간 동안 지낸 천도재는 두시간 동안의 출가 수행과정이며, 칠칠재로 49재를 지내면 49일간 즉 일곱번 발심의 출가 수행이다.

 

49재는 ▶선 . 교 등 불교의 종합선물세트 ▶영가와 살아있는 자가 동시 출가하는 수행의 마당 ▶발심수행의 구도 자세를 공고히 하며, 조건 없이 베푸는 보살행의 구현 으로서 49재이기도 하다.

 

49재에 비불교적인 요소가 있다면 종단차원에서 걷어치워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49재는 근본 가르침에 입각했으며,전통 및 정통성과 , 내용의 함축성과 대중성이 있기 때문이다. 49재에 비불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생사윤회, 인과에 대한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오해 또는 49재를 폄하하려는 무지에 기인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선 천도재(49재)의 각 철차를 앞서 설명한 생사관에 입각하여 요약설명하고 차후 기회가 되면 자세한 내용을 피력하고자 한다.

 

49재의 ▶첫 단락은 ‘시련절차’ ▶두 번째는 ‘대령의식’ ▶세 번째는 ‘관욕’▶네 번째는 ‘신중작법’ ▶다섯 번째는 ‘상단불공(지장청)’ ▶여섯 번째는 ‘중단퇴공’ ▶일곱 번째는 ‘관음시식’ ▶여덟 번째는 ‘봉송의식’이다.

 

 

1. 시련(侍輦)절차 

앞서 제시한 바,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은 ‘일체이며 일심’이다. 영가와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일체’와 ‘일심’이기에 차별이 없다. 다만 현 세상 인연이 다했기에 영가인 것이며, 호흡하기에 살아 있다고 느낀다.

 

장례가 끝나면 49재를 지낼 사찰에 위패를 모시는 첫 순서가 ‘시련절차’다. 영가나 재자가 사찰에서 생사해탈의 대 지혜를 얻고자하는 입산 출가를 의례화 한 의식이다. 단지 삭발염의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목표가 생사를 해탈하고자 함인데 출가라 해도 무방하다. 부처님 공부를 직업적으로 하면 승려, 세속 생할을 하면서도 수행자의 자세로 살면 역시 출가자나 다름 없는 부처님 제자다. 죽은자를 대동하고 산자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한번 해보자며 절 도량에 들어서는 의식이다.

 

 

2. 대령(對靈)

출가를 하면 육체와 정신세계가 180도 변한 상황에 처한다. 첫 행자실에 발을 들여 놓으면 모든 것이 낯설다. 영가를 인격화 하여, 영가도 그러할 것이라는 자비심의 발로가 대령이다. 도량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할 준비를 해야 하기에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기력을 차릴 여유를 주는 한 절차다. 

 

영가에게 간단하게 공양을 제공하고 법문으로 위로하며, 안심시켜서 천도절차(수행절차)에 따르도록 주문한다. 출가 첫날 행자실에서 먼 길을 온 피곤함을 잠시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준비를 라도록 하는 것이다.

 

참석 재자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해서 앞으로 봉행될 의식에 집중하며, 의식의 진행에 따라서 부처님의 진리를 잘 배워서 봉행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법주는 사전 동참 재자에게 일러줘야 한다.

 

 

3. 관욕(灌?)

물(水)은 정화의 의미가 있다. 정성을 들이거나, 불공을 올리기 전 목욕재계(沐?齋戒)하는 바, 부처님의 법음과 형상화된 의식으로 영가를 목욕시켜서 청정한 수행자의 자세를 갖도록 하는 절차다.

 

49재에 참석한 재자들의 입장에서는 관욕 시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은 죄업과  생전에 영가에게 잘 못했거나 서운했던 일들을 참회와 더불어 이해함으로써 마음의 관욕을 해야 한다. 이것이 참석대중으로의 자세며, 역시 법주는 대중에게 반드시 그리 마음을 먹도록 일러줘야 한다. 

 


4. 신중작법(神衆作法)

영가든 재자든 부처님의 법음을 듣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려면 그 과정에서 걸림이나 장애가 없어야 한다. 이를 의식적으로 표현 한 것이 신중작법으로 부처님 법을 보호하는 신중을 청해 모시어서 재를 무사히 마치게 발원하는 의식이라 할 것이다.

 

영가는 번뇌를 소멸하고 마음을 정리하여 원만한 수행자의 자세를, 참석재자는  마음의 자세와 일상의 주변을 건강하게 가꾸어서 도량과 사회를 청정하고 질서 있게 장엄함을 의미한다. 영가와 재자가 모두 일심, 일체 이기에 재자의 마음가짐이 바로 영가의 입장이다.

 


5. 상단불공(上壇佛供 / 地藏請)

인류에게 대 자유의 큰 가르침을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이타행의 보살을 찬탄하고, 경배함은 수행자로서 기본자세다. 영가나 재자가 극락을 가든 또는 깨달음을 얻든 부처님과 그 도량과의 인연은 축복이며, 행운이다.

 

일차 모든부처님과 보살님께 공양을 올려서 불퇴전의 심심을 돈독히 해야 함은 너무나 지당하다. 영가는 극락을 재자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감에 제불보살께 공양과 앙축의 의미로서 불공이다. 불공은 신심을 공고히 하며 자비심을 키우는  절차다.

 


6. 중단퇴공(中壇堆供)

부처님께 공양과 앙축을 올렸으면 호법신중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니 부처님 전에 올린 공양물을 중단에 내려서 올린다.

 

영가나 재자에 있어서 호법신중의 참의미는 삼보를 호지하는 의지이며, 불퇴전의 신심이다. 현실세계에서 도량과 우리의 주변을 옹호하며, 인간을 비롯한 자연생태, 동식물 등 만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이웃에 베풀음이 중단퇴공의 참 의미이다.

 


7. 관음시식(觀音施食)

영가나 재자의 본격적인 수행의 장이다. 시식이란 영가와 재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으로 음식을 주며, 경전과 게송, 진언과 법문을 해 주는 의식이다. 영가나 재자 모두 마음의 이치를 깨닫고 본격적으로 부처가 되는 절차다. 관음시식의 첫 장 ‘착어’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원담적 무고무금 묘체원명 하생하사 변시 석가세존 마갈엄관지시절 달마대사 소림면벽지가풍 소이 니련하측 곽시쌍부 총령도중 수휴척리 제불자 환회득 담적원명저 일구마 부앙은현현 시청명력력 약야회득 돈증법신 영멸기허 기혹미연 승불신력 장법가지 부차향단 수아묘공 증오무생 (靈源湛寂 無古無今 ?體圓明 何生何死 便是 釋迦世尊 摩竭掩關之時節 達摩?師 少林面壁之家風 所以 泥蓮河側 槨示雙趺 總嶺途中 手携隻履 諸佛子 還會得 湛寂圓明底 一句마  俯仰隱?? 視聽明歷歷 若也會得 頓證法身 永滅飢虛 其或未然 承佛神力 仗法加持 赴此香壇 受我?供 證?無生)’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부터 중국선불교의 창시자 달마대사 까지 운운하며 단박 깨닫지 못하였으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법단에 동참하여 법다운 공양을 받고 무생법인을 얻으라는 최상승 법문이다.

 

부처님가르침의 진수를 깨달으라는 주문으로 49재(천도재)를 애초 기획한 이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착어는 합장자세로 또박또박 읽으라 하는 바, 필자는 그 의미를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준엄하게 직시토록 하려고 일체의 기교를 배척 했다는 의견이다.  본 장에서 알 수 있는 바, 49재의 참 의미는 죽음을 통한 무상을 깨달아서 생사해탈 즉 열반증득하라는 것이다. 

 

한 대 목 더 소개하면, 백초임중일미신  조주상권기천인  팽장석정강심수  원사망령헐고륜 원사고혼헐고륜 원사제령헐고륜 (百草林中一味新   趙州常勸幾?人  烹將石鼎江心水 願使亡靈歇苦輪   願使孤魂歇苦輪   願使諸靈歇苦輪) 백가지 풀잎 중에 새로운 한맛이여 조주스님께서 항상 몇 천 사람에게 권하시였든가, 돌솥에 강심수로 정성을 다해 다렸으니 ‘망령’ ‘고혼’ ‘제령’이여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조주는 너무나 유명한 선사다. 조주가 한 승려에게 여기에 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가 있다고 대답하자, 조주는 ‘차나 마셔라(喫茶去).’하였다. 또 다른 승려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승려가 없다고 하자, 이번에도 조주는 ‘차나 마셔라.’하였다.

 

옆에 있는 원주(院主)가 온 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차를 권하고,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차를 권하냐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원주에게도 ‘차나 마셔라.’하였다.

 

만물에 차별이 없음을 깨우치는 사례로서 일화다. 조주 스님은 일상적인 것을 이용하여 많은 제자를 깨우쳤다. 이 화두는 조사선의 핵심사상인 일상생활이 곧 도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만물일체(萬物一體) 사상을 대표하는 화두로 유명하다.

 

영가나 재자든 조주선사의 평상심시도를 깨우치게 하는 게송이며 주문이다. 강심수 즉 계정혜(江心水=戒定慧)로서 생멸의 세계에서 진여의 세계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에 제령(諸靈) 즉 모든 영가(모든 생명들)들이 윤회에서 벗어나라하니 대자대비심의 발로다.

 


8. 봉송(?送)

관음시식을 통하여 부처님의 법음(法音)과 역대 선사의 게송, 진언으로 영가나 재자는 수행을 하리만큼 했으니 영가는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재자는 세상에 나가 가르침을 회향하라는 보내는 의식이다. 

 

법주는 아직 깨닫지 못했을까 염려하는 자비심에서 마지막 까지 애를 쓰니 그 게송이 ‘상래 시식풍경 염불공덕 이 망연야 불리망연야 이망연즉 극락불찰 임성소요 불리망연즉 차청산승 말후일게 사대각리여몽중 육진심식본래공 욕식불조회광처 일락서산월출동(上來 施食諷經 念佛功德 離 ?緣耶 不離?緣耶 離?緣則 極樂佛刹 任?逍遙 不離?緣則 且聽山僧 末後一偈  四?各離??中 六塵心識本來空 欲識佛祖回光處 日落西山月出東)’이라 했다.

 

봉송은 대 회향이며,  영가나 재자 모두 열반을 증득하고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켰으니 영가는 대 자유의 청정법신비로자나의 세계로, 재자는 망인에 대한 애착이나 죽음에 대한 온갖 걸림에서 자유로우니 바로 현실정토의 향기를 호흡하라 함이다.

 

대충 설명했다. 의아해 할 독자도 있을 것이나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현실의 종교다. 불교의 모든 의식은 근본가르침에 부합하여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현실세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처는 사람이며, 사람이 부처다. 거듭 산자나 죽은 자나 차별이 없기에 ‘일심이며 일체로서 동체대비’다.

 

49재는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입각하여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와 역대조사의 어록 그리고 의식주의 일상을 변형시킨 문학과 예술이 깃든 49일간 단기출가의 대 서사시다. 49재 등 제 의식의 한글화와 설명 그리고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사전에 주지나 관계 승려는 그  의미를 불자들에게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인류는 행복하듯 하나 늘 불안하며,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며 새로운 안식처를 찾는다. 그 답을 주는 한 방편이 천도재일 수 있다. 단 그 것을 어떻게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고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가르침과 의식의 본질은 살리되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이해와 접근이 쉬우며, 일상에서 불교를 호흡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생각한다.

 

 

앞서 간자

지금 가고 있는 나

뒤에 올 자

한 상에서

밥 먹으며 노래한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