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절없이 적막에 휩싸여 비에 젖는 부처님 진신사리탑
<비가 내린다. 가는 비가. 가는 실비는 후두득 후드득, 마침내 소나기가 되어 장대처럼 쏟아진다.
이곳 해발 1,244 고지, 나무도 젖고 돌과 바위도 젖고 마침내 지나는 바람마저 비에 젖어 나뭇가지에 쉬고 있는 설악산 봉정암, 푸른 이끼의 두께가 긴 세월의 역사를 대변하는 부처님사리탑도 속절없이 비에 젖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속산의 적막 속으로 깊게 깊게 잠겨 가고 있다. 나는 비에 젖어 천근만근 늘어지는 육신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한 채, 불뢰사리탑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삼배의 예를 올렸다. 그 어떤 감당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과 성스러움이 주위를 둘러쌌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미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발등을 적셨다. 섬득, 스치는 섬광 하나. 등줄기가 오싹하여 전율한다. 아! 아! 부처이시여! 나는 무너져 내렸다. 거기 부처님 전에 엎드려 한 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비를 맞고 있어야 했다.>
▲ 속세에 지친 나그네는 다짐, 다짐 끝에 드디어 순례의 길에 들고
살아생전 꼭 한번은 찾아가 참배해야 할 그 곳.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한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인생에 회한이 들면 얼강망태 하나 둘러메고 봉정암에 휭하니 다녀오라고... 그러나 봉정암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대여섯 시간씩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수 십 번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생을 감내하고 마침내 이제는 다 왔나 생각할 즈음 턱 하니 나타나는 깔딱 고개 하나, 그 마지막 난관의 관문을 두 팔 양다리로 바위틈과 풀뿌리에 매달리며 사지로 기고 기며 젖 먹던 기운마저 소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다르는 곳이 봉정암이다. 그렇게 가기가 힘든 다는 곳을 과연 나도 갈 수 있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찾아가는 곳. 찾아간다고 마음먹는 자체가 신심이며 대단한 용기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18일 12:00 백담사 공양간에서 식사를 하고 드디어 꿈에서 동경만 하고 있던 봉정암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맛비도 주춤하여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더욱 청명한데 처서를 며칠 남기지 않은 막바지 더위는 30도를 넘나들며 기승을 부린다. 몇 발자국 못 가 이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바짓가랑이가 쓰적거린다. 나는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차근차근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산문(山門)입구 소로(小路), 모두가 말이 없다. 지레 겁을 먹어 반신반의하며 길을 나섰던 구도자들은 비로소 걷는 것에 대한 습(習)으로 안도의 한숨과 주위를 살필 수 있는 틈새의 여유로 땀도 훔치며 이야기도 나누고 1시간 40여 분,
▲ 마음을 닦고 맑은 숨결로 가라는 걸까? 영시암 감로수가 꿀맛
영시암에 다다랐다.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길을 재촉한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본격적 자기와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수렴동 계곡, 계곡은 깊이를 더할수록 풋풋함과 싱그러움이 배가 되고 미소 잔뜩 머금은 소(沼)의 한기(寒氣)가 가슴 가득 채워져 신선한 충격으로 상쾌함이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그 무덥고 찌뿌드드한 기운도 사라지고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들이 가볍고 하늘은 구름이 해를 가려 산을 오르기에 안성맞춤이다. 말없이 풍경을 음미하며 잠시 나를 잊는 것, 도시의 침묵은 사람을 외롭고 불안하게 하지만 깊은 숲길의 침묵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갈래길, 오세암을 지나 봉정암에 오르는 길과 바로 봉정암으로 가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 복장과 신발을 점검하고 바로 봉정암에 이르는 길을 택하여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간다. 잠시 묵시적 침묵이 흐르고 물소리 바람 소리 양옆으로 병풍처럼 둘러 처진 산수화의 개울길, 나는 입을 크게 벌려 심호흡을 한다. 상큼한 잡목들의 에테르와 계곡수의 청정한 습기가 가슴 가득 채워져 작은 돌 큰 돌 혹 바위로 된 협도(狹道)에 발걸음이 가볍다. 돌과 돌, 나무와 나무로 물과 물로 된 계곡의 속, 이미 사람과 친해진 날 다람쥐들의 호들갑스런 반김과 어쩌다 발길에 밟혀 가슴 아프게 으스러진 들꽃들의 비명, 간혹 사라질 듯 나타나는 문드러진 길 사이 들여다보는 낮은 곳마다 새침 웃음 흘리는 흰 물봉선 무리, 먼저 온 이들의 정적을 깨는 지껄임, 비라도 오려나 이내 속내는 침침하여 카메라 노출이 약하다.
▲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 거울이라는 표면에 비친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 나는 업경대처럼 나의 업보를 명경수에 비추어 본다
▲ 단애(斷涯)와 단애사이 일 폭 이 폭~십 폭까지 협곡에서 쏟아지는 물길들에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우쳐준다
아! 여기가 어딘가! 탄성이 절로다. 협곡 기암괴석으로 아기자기 둘러쳐진 산자락 저 위 졸졸 샘에서 시작되었을 개울 어느 선녀가 금방 목욕이라도 하였을 너무 맑아 속 끝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크고 작은 소(沼) 아직은 푸른 당단풍 한 그루, 물 쪽 웅덩이로 늘어진 가쟁이 그 청록의 비취 잎들 물 위에 비춰져 잔잔히 파문으로 출렁이는 물결 따라 일렁거려 예쁜 새아씨 부채춤사위 같다. 졸졸, 좔좔, 쏴아, 찔찔 본격적 물골 안 물소리들의 중구난방 애잔한 합창이 동공을 흔들고 허공을 흔들며 자장나무가 힘겹게 지고선 빈 하늘 구름에까지 닿는다. 모나고 둥근. 길고도 가파른 자지러짐. 시작과 끝도 없는 협곡 물의 비장한 합창. 어느 연로한 음악가의 마지막 혼신의 지휘, 그 비장한 화음에 문득 뼈가 시리다. 몇 사발씩 피를 쏟는 독공수련의 명창처럼 작으막한 폭포의 소리 들릴 듯 끊어질 듯 애절하고 도돌이표 투성이 단조로운 악보 연주는 잡목들 휘감는 한 줄기 바람 시새움에 묻히고 너무 서둘러 혼자 와 버린 탓에 뒤 따라오는 동료들 수다가 간간이 위치를 확인해 온다. 티끌 겁, 모래 겁의 세월 켜에서 기암과 단애가 생성되고 그들 안에 나무와 들풀 들 그려 이 거대한 명화로 남았건만 그토록 자연을 담으려 애쓰는 내 안의 나는 아직 이 소로 연보라 빛 들꽃조차 제대로 화선지에 옮기지 못하고 지독한 도로(徒勞)에 빠져 허우적인다.
▲ 하늘을 치받치고 선 적송, 끊임없이 올곧은 정진만이 지금 내가 할 일.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나
시간의 도로(道路)를 운행하는 내 삶의 경치 어쩜 저 냇물같이 덧없이 흐르는 짓일 진데 어이하리! 산다는 일이란 그렇게 억지로라도 정상까지 올라야 하는 인내와 고행의 연속. 그래도 가야 하는 조금은 지루한 계곡 산행, 길옆 덤불 가랑잎 위 떨어진 다래 몇 알 주워 입 속에 터트린다. 덜 익어 떫은 맛으로 입안 가득 신 침이 고인다. 명경수(明鏡水) 한 웅큼 떠서 입안을 씻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4시간가량 지속된 물골 안 지루(地壘) 산행 이제 이 황홀한 계곡의 개울은 작별인가, 조금은 지리 했지만 그래도 잘 와 주었는데 지금부터가 봉정암을 오르는 막바지 오르막 깔딱 산자락의 시작이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 앞에서 길을 재촉 한다. 가르마처럼 조붓 말쑥한 산중 가파른 비탈의 시작, 빗방울이 후두득 인다. 빗물의 젖은 진초록의 수 백 년 갈참나무 수목들이 청포처럼 싱그럽다. 언제나 그렇듯 산은 매일 와도 올 때마다 새롯새롯 새 정이 묻어나지만, 봉정암 그 성지로 오르는 길은 새로운 정보다는 좋은 풍경의 취함이 너무 길어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언제쯤 이 길은 끝나는가 의구(疑懼)의 지루함이 더 깊다. 봉정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길을 묻는다. "아직 멀었어요?", "네 조금만 가면 돼요" 늘 대답은 같다.
▲ 이제 200m 드디어 순례의 성지 봉정암이 눈앞이다.
깔딱의 고개, 두 팔과 양다리로 엉기고 매달리며 마지막 안간힘을 다 한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멀쩡하던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린다. 가끔 건자재를 매달은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미리 우의를 장만하지 못함을 몸에게 미안해하는데 가볍게 멘 배낭이 물기를 머금어 점점 무게를 느끼게 하고 시간은 거의 오후 4시 반이 넘어 다섯 시에 가깝다. 저 앞 기암괴석 산자락, 공룡능선의 모습은 안개의 젖어 가진 것 모두 버렸다 안았다 어둠으로 둘러 쌓인 묘지 같고 작은 산들 능선마다 안개 막 한 겹 더 휘감겨 보이지 않는 는개비 된다. 공복은 허리춤 더욱 조이게 하고 허기는 목구멍 넘어 턱밑이다. 준비한 김밥 풀어 동막 바위에 풀어놓자 체면이 밥 먹여 주나 빗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이 된 김밥 입안에 밀어 넣기 부산이다. 시각과 후각이 고만한 것에 매혹되어 혀의 기쁨은 배가되고 위 홀이 팽만하여 흡족해 온다. 김밥이 이렇게 맛이 좋았나?
▲ 피안의 바다, 그 심연 속으로 깊게 깊게 침잠하며 경치, 절정에 이르다
빗줄기는 더욱 드세져 소나기로 내리고 거의 거의 속옷도 젖어간다. 저기가 꼭대기 봉정인데...빗물에 젖어 잎사귀 늘어트린 억새풀 길, 정수리에 스치는 잎 새가 발목을 잡아챈다. 굽어보는 저위 산봉우리, 부치는 힘 안간힘으로 드디어 맨땅. 걷고 기고 안기며 드디어 단아한 봉황의 품에 안겼다. 거의 6시간을 더 걸어서. 봉정암, 살아생전 꼭 한번은 찾아와 참배해야 할 이곳, 부처님 성지에 섰다. 갑자기 빗방울이 잦아들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산허리 골골마다 고물고물 이어지는 부산한 안개 무리의 움직임. 연미풍, 겹겹 산들 능선을 휘감아 얼싸안고 피안의 바다 그 심연 속으로 깊게 침잠하며 농익은 애무 절정에 이른다. 심히 산, 살을 떨며 긴장하고 애절한 남녀의 질탕한 정사처럼 극한 상황 속에서 오르가즘은 배가 되고 저 고독한 산 바다에 늪 속, 깊이 깊이 잠수하여 떠 있는 한 개의 섬이 된다. 거기 나 홀로 남아 황홀하다. 아득하다. 아득하여 몽롱하다. 그저 아! 아! 몇 分의 시간, 순간의 신비와 조화 그리고 알지 못할 성스러움에서 오는 감동이 이내 산 전체를 덮고 안개는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다.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뿐 누구도 말이 없다. 아니 말이 필요 없다. 그건 소중한 체험의 군더더기 일터이니 결코 잊지 못할 봉정암 정상에서의 체험.
▲ 설악산 9부능선 봉황에 품 봉정암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주일 후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