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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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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성도재일 법회 봉행

  • 입력 2019.01.13
  • 수정 2024.12.16

 

▲ 조계사는 음력 12월 8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일 법회를 지난 13일 대웅전에서 봉행했다. 이날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께서 ‘부처님 깨달음의 의미’란 주제로 법문했다.
 

조계사는 음력 12월 8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일 법회를 지난 13일 대웅전에서 봉행했다. 사부대중은 깨달음을 위한 자신의 신행을 성찰하고, 수행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성도재일 법회에서 ‘부처님 깨달음의 의미’란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성도의 가르침은 곧 인과응보적인 노력이라며, 인연에 따라 달라지는 부처님의 세계관·존재관에서 친절과 자비라는 실천을 습관화하자”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

 

성도절은 부처님이 출가 후 도(道)를 이룬 날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바로 그 도를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다양한 깨달음 중에서도 부처님께서 얻은 깨달음은 가장 높고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입니다. 올바른 깨달음이란 뜻에서 무상정각(無上正覺), 가장 큰 깨달음이라 대각(大覺), 흠 없이 완벽한 깨달음이라 원각(圓覺)이라고도 합니다. 성도절에 불자들은 이 같은 깨달음의 의미를 기리고, 깨달음을 위한 실천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 대문을 보면, 양쪽 기둥에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왼 기둥에는 “부처님 깨달음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이, 오른 기둥에는 “나고 죽는 생활의 현장이 바로 깨달음이 있는 곳이다”란 대답이 적혀 있어요.

 

팔만대장경엔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45년간 설법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지키는 곳 입구에 저 문답이 쓰여 있습니다. 깨달음이 저 위의 하늘에 있다거나, 신의 뜻에 따른다거나, 내생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 현실을 초월하는 곳이 아닌 우리가 사는 삶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란 말씀이겠죠.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35세에 성도했다고 합니다. 불기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2563년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성도 후 45년 간 설법하신 뒤 열반에 드셨으니, 부처님께서 성도한 지 2608년이 흐른 겁니다. 당시 인도는 범천(하늘)이 삼라만상을 만들어냈고, 바라문·평민·노예 계급 등 변하지 않고 대대손손 세습된 차별이 있다고 봤습니다. 불합리한 제도에 의해 부당하게 착취당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넉넉히 먹지도 못했던, 아주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어요.

 

이런 시절에 부처님께서는 불행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기 위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즉 삶이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이치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였죠. 신이 존재하는지, 내생에 대해 알고 싶어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속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숭고하고, 오묘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말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지지고 볶고 희로애락이 가득 차 있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만 6년간 구도의 길에 올라 삶이 무엇인가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우환은 ‘나’라는 몸뚱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부처님은 마음을 알고 싶어서 선정 수행을 했습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무너지고 따라가는 마음을 잘 정돈하고, 가지 쳤습니다. 점차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인생이 무엇인지 잘 알겠다 싶어서 삼매, 참선을 했죠. 그런데 마음수행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자야하고, 추위에 옷을 입어야 하고…. 몸이 필요로 하는 것마다 좌우되는 삶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몸에 끄달리지 않는 능력을 얻고자 했습니다. 곡기도 끊고, 고통을 견디기 위해 가시덤불에 눕기도 하고, 갖은 고행으로 몸을 극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고행으로도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은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가장 합리적이고 몸이 무너지지 않는 방식, 중도의 길로 마침내 도를 이루십니다.

 

부처님은 모든 고행과 방탕을 멀리하고 고요히 사유·성찰하고 명상을 통해서 보리수 아래서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삶에 대한 모든 의문이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모든 존재는 인연생 인연멸이란 사실입니다.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를 만든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은 인연의 조건이 변경됨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도 삶의 조건들에 의해서 생성 유지 성사 소멸 쇠퇴하며 변천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오늘날 사람들이 보면 대단할 것 없는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이 깜짝 놀랄만한 결론이었습니다. 이 이치는 깨달음이란 이름으로 모두에게 전파됐습니다. 삶, 세상만사는 인연생 인연멸 즉, 인연에 따라 생기고 멸한다는 것을요. 이는 연기(緣起)나 인과응보 같은 말로도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가 성도절에 되새겨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상만사에는 우리 눈, 귀로써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때는 인과응보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의 노력보다도 주변인과의 인연, 모든 사회의 조건들이 얽히고설키는 바람에 잘 되기도, 못 되기도 합니다.

 

인연생 인연멸은 우리 모두 노력해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서로 연관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나’의 생존과 흥망은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 사회, 나라 등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웃을 위하고 자비를 행하라’ ‘남을 보살피고 친절을 베풀라’는 말씀을 한 까닭은 결국 나 자신의 불행과 행복과 연관됐기 때문입니다. 좋은 인연이 모여서 나의 행복을 만들고 인연이 멀어지거나, 잘 안 될 때 나에게 불행과 괴로움으로 다가오니 주변을 살피고 노력하자는 것이죠.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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