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발언과 성철스님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의 ‘한 말씀’이 한동안 나라를 시끄럽게 했다. 논란의 발단은 김추기경이 정치권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던진 나라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김추기경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을 만나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라는 발언을 했다. 김추기경의 말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한 인터넷 신문에 ‘김추기경의 남북관계 발언은 위기에 처한 민족 현실을 오도할 수있다’는 요지의 반박문이 실렸다. 이 글을 쓴 필자는 유력 일간지의 논설위원이다. 논란은 증폭됐다. 글이 나가자 이른바 ‘조 중 동’이라는 우리나라 거대 매체가 동시에 글을 쓴 논설위원이 김추기경을 모독했다며 몰아세웠다. 특히 조선일보는 기사 외에도 기자칼럼, 사설, 만평 뒤이어 논설위원 칼럼 까지 총동원해 ‘한 좌파 지식인이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인 김추기경의 도덕적 권위를 깍아내렸다’고 비판했다. 지면을 통한 논란에 그치지 않고 일부 우익단체는 조선일보가 ‘좌파 지식인’으로 규정한 기자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김추기경의 발언은 한동안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반미 친북 쪽으로 흘러간다’는 김추기경의 시국인식이 올바른지, 그 뒤 벌어진 유력 언론인 . 언론사간의 논쟁이 맞는지에 관해서는 본 글이 다룰 내용이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존경받는 종교인의 발언과 권위에 관한 것이다. 김추기경의 말 한마디에 우리 사회가 그토록 홍역을 치른 것은 그가 갖는 권위 때문이다. 김추기경이 몸담고 있는 천주교는 신도수로는 세계 4위지만 ‘파워’만큼은 최고다. 그 정점에 교황이 있으며 바로 아래가 추기경이다. 대개 1국 1추기경인데 유럽 일부국가와 중남미 필리핀 등 신자가 많은 나라는 2명을 두기도 한다. 그 수는 전 세계적으로 150명 가량 되며, 추기경들이 추기경 중에서 교황을 선출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교황 후보에 올랐었지만 백인이 아니면 선출되기 힘들다. 김추기경이 원로로 존경받는 이면에는 이처럼 가톨릭 교단의 배경도 작용하지만 70, 80년대 서슬퍼런 독재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쓴소리를 마다않던 기백과 용기,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면서 쌓은 신망이 더 크게 작용했다. 종교인으로서 그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김추기경의 발언에 대해 ‘딴지’를 건 이른바 ‘좌파지식인’은 말을 잘못한 것인가. 우리 사회가 반미 친북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보면 김추기경의 말이 옳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김추기경이 틀렸다. 남북문제 만이 아니다. 노사관계, 환경과 개발, 입시문제, 이라크 파병, 요즘 우리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 운동 까지, 일방적인 주장만 있는 이슈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주장만을 강요하는 사회를 우리는 닫힌 사회라고 부른다. 종교인의 권위든, 국가권력이든, 폭력이든 그 무엇으로도 한 면만을 강제할 수없다. 왜냐하면 새가 좌우 두 날개로 날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 듯,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 양면을 갖는 것은 자연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비와 분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추기경 발언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은 ‘추기경이 세속의 시비에 뛰어들었다’ 이다. 그것은 김추기경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다. 시비를 붙었다고 시비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일체의 시비를 떠난 ‘종교인’이 있으니 바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스님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성철스님은 1980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법어를 남겨,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멸(寂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물론 앞부분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산은산 물은 물’만 남았지만. 일제시대에 출가했던 스님은 1993년 초겨울 열반에 들 때 까지 세속의 일에 단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일제부터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 한국전쟁, 근대화, 민주화, 통일운동 등 스님이 수행자로 살아온 시대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다 못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스님은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땅에 떨어진 한국불교의 수행가풍을 세우기 위해 마련했던 봉암사 결사가 전쟁으로 위협받자 남해로 자리를 옮겨 수행을 계속했다. 같이 공부하던 청담스님이 정화운동에 나서자고 권유할 때도 스님은 수행자 개개인이 공부하지 않는 정화는 무의미하다며 오히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님은 서슬퍼렇던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도 거부했다. 스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종정 취임이전에도 많았지만 ‘산은 산 물은 물’이 사회적으로 회자하고 종정이 되고나서는 친견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특히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일고 불교계도 그 영향을 받게 되자 스님의 ‘한말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 기독교의 박형규 강원룡 목사가 젊은 사람들과 재야인사들을 후원하자 성철스님에 대한 압력(?) 더 거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입을 열지않자 젊은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스님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스님이 독재정권을 옹호한다고 까지 몰아부쳤다. 시국 선언을 요청하기는커녕 만날 수조차 없자 명문대를 졸업하고 70년대 초반부터 스님을 시봉하던 원택스님이 애꿎은 욕을 먹기도 했다. ‘한 말씀’ 요청은 사회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잠잠해졌다. 지금도 많은 스님들과 학자들은 스님이 사회현실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고 비판한다. 수행자가 도를 닦아 깨치는 이유는 중생들을 구제하기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해 자유를 억압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 역시 회향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당연한 논지다. 그렇다면 스님은 과연 아무 말씀도 안하셨는가. 1986년 봄 부처님오신날 법어를 들여다보자. 당시는 운동권 내부에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 주인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는, 사회주의 노선이 활발할 때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 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바위 되어 우뚝 서 있는 한가로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 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 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눈을 떠도 부처님, 눈을 감아도 부처님. 광활한 이 우주에 부처님을 피하려 하여도 피할 곳이 없으니 상하사방을 두루두루 절하며 당신네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는 모든 고뇌를 초월하여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곳곳이 불가사의한 해탈도량이니 신기하고도 신기합니다. 입은 옷은 각각 달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함없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자비의 미소를 항상 머금고 천둥보다 더 큰소리로 끊임없이 설법하시며 우주에 꽉 차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나날이 좋을시고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서로 존중하며 서로 축하합시다“ 성철스님이 아무런 말이 없다며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당시 노동자 농민 학생 진보적 지식인이 힘을 합쳐 ‘모두가 잘사는’ 새사회를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성철스님은 이들 뿐만 아니라 교도소 안의 죄인, 술집 작부, 벌나비 꽃이 모두 한 뿌리고 한몸이며 모두 평등하다고 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누가 더 진보적이며 파격적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스님이 아무런 말을 안한다며 불평 불만을 흘렸는가. 왜 그들은 성철스님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됐는가.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을 히말라야 산 정상에 오른 것으로 묘사한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서면 동서남북 사방의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처럼 도를 닦아 깨치면 세상의 진리를 통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히말라야 산 정상에 선 것은 향상(向上)의 진리를 깨친 것이며 작은 봉우리에 선 것은 향하의 진리만을 터득한 것이다. 똑 같이 인간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스님은 평생을 바친 처절한 수행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모두 한 뿌리며 평등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보았고, 운동가와 정치인들은 분노를 통해 사람 그 중에서도 권력을 갖지못한 일부분만 평등하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그들의 논리는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바뀌면 거짓이 되는 생명이 유한한 ‘진리’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주장과 시비를 일으킨다. 마치 발아래 산봉우리가 키재기 하는 것 처럼. 언론에서는 김추기경의 말에 시비를 거는 것을 두고 존경받는 종교인의 도덕적 권위를 깍아내린다고 아우성이지만 불교에서 보면 시비는 당연하다. 문제는 종교인이 만고에 빛나는 진리를 말하느냐 그 순간에만 필요한 말을 하느냐는 차이다. 작은 산봉우리들은 서로 누가 큰가 씨름하지만 높은데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 일 뿐이다. 시비에 걸리지 않는 말을 하는 참다운 종교인이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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