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의 조계사,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아어학교
100년전 전후, 조계사 터의 역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조계사는 몇십년간 근대 불교의 오욕과 영광을 함께 해온 땅이지만, 이전 시기 땅의 역사는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던 조선의 역사가 깃들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조계사는 조선시대의 궁궐이었던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 있으며, 덕수궁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각종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러일전쟁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간의 전쟁이 조선에서 반발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의 주 무대는 한반도 북부 땅이지만, 황실이 도심에 있었기에 서울을 어느 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러시아 군인을 포함하여 미국, 영국군, 이태리 군인등 약 300여명의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전쟁을 개시합니다. 2월 8일, 일본 육군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합니다. 러일전쟁의 선발대로 일본군 1개 여단병력이 서울로 입성한 것은 2월 9일부터였습니다. 서울에 입성한 일본은 당초에는 진고개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가옥들에 분산 투숙하지만 그 수가 점점 더 많아져 일본인 가옥에의 수용이 불가능해지자 2월 18일 이후부터는 시내 각처 건물에도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종로구청, 조계사 터는 물론이고 용산, 서대문 등지에 주둔했었습니다. 그때 일본군을 수용한 건물 중 아어학교(俄語學校)가 있습니다. 러일 전쟁 당시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아어학교가 지금의 조계사 터에 있었습니다. 아어학교의 ‘아(俄)’는 러시아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아관파천’은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이전한 것을 의미하지요? 여기서 ‘아관’은 정동에 있었던 러시아 공사관을 의미합니다. 100년전 지금 이맘때입니다. 러일전쟁의 일본군 선발 부대가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아어학교(俄語學校)의 설립 1890년대에 외국어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습니다. 쇄국정책에서 벗어난 조선이 맞이한 것은 근대 서양 문물로 대표되는 ‘개화’ 였고, 개화의 계몽적 산물은 교육이었습니다.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어의 습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개화기의 조선은 관립외국어학교(Royal Foreign Language School)를 설치하였습다. 1891년의 일어학교, 1894년의 영어학교, 1895년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법어(法語)학교, 1896년의 아어학교, 1897년의 한어학교 그리고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1898년에 덕어(德語)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조계사 터에 있었던 아어학교의 설립은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전한 아관파천이 있었던 바로 그해 189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내각이 설립된 계기가 아관파천이기에, 그 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아어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어학교와 중국어학교 편제가 3년이었던 것에 비해, 아어학교 등 서양 나라 언어를 배우는 외국어학교는 5년 편제였습니다. 외국어 학교는 관립학교이기에 황실에서 교과서와 지필묵을 지급하고 점심값을 주기도 하였습니다.아어학교의 외국인 교관은 Biruoff였으며, 한국인 교관은 한구호, 곽광의였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외국어교사들의 출신을 보면 다양하였다. 예컨대 영어학교의 T. E. Halifax가 전신기사였고, 법어학교의 E. Martel은 上涇 세관에서 근무하였고, 아어학교의 Birukoff는 예비역 포병대위였습니다.외국어학교는 외국어만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일반 교양과 외국어, 교련과목 등을 함께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대학·논어·맹자를 매우기도 하였으며, 역사·지리·수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특이한 교과목이 교련 과목입니다. 외국어학교에서 교련을 실시하는 데 학교 교관에 따라 구령이 달랐다고 합니다. 아어학교에서는 러시아 구령이, 일어학교에서는 일어 구령으로 달랐다고 하네요. 러일전쟁과 아어학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아어학교는 폐지됩니다. 아어학교 설립이 1896년 5월이니깐, 일본군이 주둔한 1904년 2월을 폐교 기점으로 삼으면 8년만입니다. 아어학교의 졸업생 등 학생들에 대한 기록은 과문해서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일어학교나 영어학교처럼 많은 수를 기록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영어·일어를 제외한 불어, 독어학교 졸업생도 많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요.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쇠퇴하자 러시아와 조선의 관계는 그 이전 시기에 비교하여 다른 양상을 띄게 됩니다. 을사조약, 한일합방 등 식민지 시기로 접어 들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합니다. 암울한 시기가 급기야 도래한 것입니다. 여타 조선인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러시아 유학생들입니다. 러시아 유학생 13명을 선발하여 러시아 수도에 유학케 하였으나 러일 전쟁 이후 국교가 단절되면서 학비를 지급치 못하고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국하는 길이 어렵게되어 몇 명만 귀국하고 심영섭 씨등 몇 명이 귀국치 못하다가 1906년 6월에 부산항으로 입국한 기록이 있습니다. 친러파 내각 때 러시아로 유학을 보냈는데, 전쟁 이후 이들에 대한 대책이 없어졌던 거지요.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내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아어학교에 주둔하였던 일본군이 용산과 남산의 일본군 주둔지로 이전하고 보성전문학교가 1905년 5월 설립되면서, 조계사 터에 있었던 아어학교의 짧은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참고자료>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 http://seoul600.visitseoul.net/index.html김효전, 구한말의 관립 덕어학교, 2000, 출처불명 논문이규태, 개화백경 6, 조선일보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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