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발자취와 함께 한 십일간의 기록
지역 : 인도기간 : 11월 18~28일 (10박 11일)운송수단 : 기차, 버스참여인원 : 23명 (스님 1명)여행코스 : 델리-엘로라&아잔타-산치-타지마할-아그라-기원정사-룸비니 쿠시나가라-바이샬리-대림정사-나란다-죽림정사-영축산-마하보디대탑 보드가야-바라나시-녹야원 드르륵..2년만에 꺼낸 여행용 캐리어에 짐을 꾸려 공항리무진에 몸을 싣는다. 버스앱에서 10여 분 후에 도착한다는 알림이 떴지만 5분 만에 버스를 타고 조계사가 있는 종각을 거쳐, 신촌, 마포를 지나 어느덧 공항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얼마 만인가. 공항리무진을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 못 들었던 것이. 특히 관광이나 휴양이 아닌 성지순례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에 더 설레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게다가 부처님의 나라 인도라니, 내가 인도에 가다니!!! 인도라고는 어릴 때부터 먹어오던 3분 요리 속 그 나라.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인도영화, 발리우드 속 그곳이란 말이다. ‘인도 남자들은 정말 그리도 조각같이 생겼을까? 인도 여자들은 다 여신인 건가?’, ‘실크가 유명하다던데 스카프 좀 사와야겠다, 아 그리고 전통의상도!!’성지순례라는 벅찬 감동은 잊은 채 나는 어느덧 잿밥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열흘간의 성지순례는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나는 원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2016년을 한 달 남기고 감행한 인도행에서 나는 욕심을 내고 있었다. 분명 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이지만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주고 싶었고, 생일 즈음을 맞이하여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거창하게나마 꿈꿨다. 부처님께서 동쪽 하늘의 반짝이는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신 것처럼 말이다(보드가야에서 번쩍 하기는 했다) 오후 네시 반, 모두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모여서 삼삼오오 준비물을 점검하고 항공티켓과 보딩패스를 받아들었다. 인솔자 스님께서 여행 팀원에게 소개를 해주셨다. 어물쩡 어색한 소개를 마치고 짐을 부쳤다. 20kg. 해마다 사들였던 조계사 봉축 티셔츠 및 몇 년간 세상구경 못 해본 옷가지들을 잔뜩 꾸렸던 짐이었다. 저혈당을 보충해줄 간식거리와 한국 먹거리들 또한 한몫했다.생각보다 무거웠던 20kg의 짐을 마음 편히 부치고 게이트로 입장. 휘황찬란 면세품들이 눈을 유혹하지만 이번만큼은 쇼핑을 자제하기로 했던터였다. 하지만 내 생일선물은 준비했지 흐흐~. 어느덧 탑승시간이 다가온다. 누군가 그랬다. 인도에서는 정시에 지켜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라고. 분명히 국적기를 타는 스케줄이건만 비행기 연착이다. 내가 인도를 가긴 가나 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녀오리라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여행 갈 때마다 찍는 나만의 허세 샷, 신발 사진도 찍어둔다. 야간비행은 묘한 설렘을 준다. 물론 아침 비행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온통 어두운 밤하늘에 대도시의 반짝거리는 불빛을 보면 그리도 가슴이 뛴다. 한 시간이 늦어져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한다. 모니터에서는 서해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기내식이 나오고 난 깨끗이 먹어치운다. 인도에서 소식을 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먹는 마지막 만찬이라서. 모니터의 인도영화를 한 편 보고 먹고 자고 여덟시간여. 20분 후에 인도 델리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가 나온다. 내가 인도에 왔다. 한 번도 안온 사람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 없다는 그 인도에 내가 왔구나! 비행기가 연착되어 새벽 두 시 반에 도착한 델리공항은 여행사 직원, 호텔 픽업 기사. 그리고 여행객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다. 여행지가 그렇듯 캐리어에 손을 얹기만 했을 뿐인데 1달러를 내놓으라 협박하는(밤이라서 더 눈동자만 보였을 수도) 현지인에게 빼앗기듯 달러를 주었다고 벌써 당했다는 팀원의 푸념에 한바탕 웃은 후,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공항 주변은 나름 고층건물과 정비된 주변이 그럭저럭 괜찮네 싶다가 호텔로 들어서는 길목, 찬 밤공기에 담요를 둘둘 둘러싸고 잠을 자는 걸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숙자는 서울에서도 많이 봤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그의 하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은 앞으로 열흘 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게 된다. 얼렁뚱땅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잠을 청하지만 한국과 세시간 반의 시차. 이미 오전 여섯시인 한국의 생체시간은 말똥말똥하기만 하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현지시각 일곱시에 맞춰서 아침을 먹고 첫 코스로 향하는 길. 생동감이 넘치는 인도의 아침? 무기력하게 길바닥에 앉아 물담배를 피우는 인도남자들이 보인다. 박물관에 도착했다. 부처님의 생애에서 봐 온 에어컨 실외기 아래 자리잡고 있는 부처님 상이 있는 그 곳이다. 모두가 국보급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유물처럼 유리관 안에 들어가있는 것도, 온도습도를 맞춘 세심한 관리도 없는 듯 한 무심한 듯 내팽개쳐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해 셔터를 눌러댄다. 박물관을 나와 파리 개선문을 본떠 만든 인디아게이트를 지나 천 년간 변함없다는 델리의 본모습. 올드델리를 버스에서 구경하고 이슬람 사원을 들어가려 했으나 기도시간에 걸려 입장불가. 그래, 예불은 존중해줘야지. 꺼지지 않는 인도의 불꽃 마하트마 간디의 무덤을 지나 다시 공항으로 향한다. 우리는 인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거든. 국내선을 타고 오랑가바드로 도착, 이미 늦은 시간인데 아뿔싸. 짐이 하나 덜 왔다. 모든 이가 사라지고 오직 우리 팀만이 공항에 남아 하염없이 컨베이어 벨트를 보며 망연자실. 델리공항에서 오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을 남기고 호텔로 투숙, 다음 일정을 준비하게 된다. 엘로라 석굴인도 성지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을 갖고 오지 않았기에 연이어 빵빵 터지는 감동에 눈물범벅이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디아나 존스에서 볼 법한 엘로라 석굴에서의 반야심경과 매일 아침 버스에서 하는 예불 및 발원문 낭독. 그리고 쿠시나가라 열반상에서 팀원이 준비해 온 가사공양을 올릴 때 가슴에서 끓어오르던 울컥함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룸비니 동산을 가기 위해 인도와 네팔 국경을 넘고 대림정사를 지나 그 당시(아마 현존했으면) 지금도 최대규모일 나란다 대학을 스치듯이 보고 나와 해가 어둑어둑할 무렵 오른 영축산의 기운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정말 깨닫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듯한 그 자리에도 앉아본다. 부처님께서 반짝이는 동쪽의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신 마하보디 대탑에서 새벽예불 후 삼보일배를 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찾은 대탑에서 모두들 흩어져 자기만의 수행을 하는 시간을 갖는데 난 스리랑카 스님과 부처님 49일간의 행적을 훑었다. 제1, 제2 순차를 거듭하는 가운데 연못에 이르러 설명을 듣는데 이런.. 모자에 가려져 앞의 돌기둥을 보지 못하고 쩌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부딪쳐 약 5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기절상태에 이르렀으니 주변 인도 아줌마가 강물을 손에 떠 머릿속을 식혀준다. 머리가 깨진 줄 아셨나 보다. 애써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황급히 일곱 군데 발자취를 돌아본 후 버스로 돌아왔다. 머리가 화끈거리고 이미 부처님 정수리만큼 둥근 혹이 불룩 솟아있다. 보드가야에서 머리를 부딪쳐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건가? 난 이미 메케한 대기오염은 안중에도 없고 이게 무슨 정황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지금도 머리를 쓰다듬으니 아직 아프다. 사실 인도에 오려는 마음을 먹으면서 욕심을 냈다. ‘멋진 여행기를 써 보리라.’ 하지만 첫날 호텔로 오는 길 노숙자의 하얀 눈동자와 마주친 후 난 수첩과 볼펜을 절대 꺼내 들지 않았다. 하물며 사진도 그리 많이 찍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을 남기는 건 인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해두자. 한편, 보드가야에서 머리를 부딪치고 스리랑카 스님에게 감사의 성의 표시를 하니 마음이 쓰이셨는지 부처님 깨달으신 보리수 나뭇잎 세 장을 건네주신다. 축원과 함께 하얀 스카프도 목에 걸어주시고.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절대 피곤하지 않았던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이것만으로도 깨달음과 비할 수 없는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뭘 바라겠는가. 난 부처님 4대 성지를 다녀온 불자인데. 마지막 코스라고 할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관광이 남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릭샤에 몸을 싣고 저녁 종교행사가 한창인 갠지스 강.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과 현지인이 섞여 축제와도 같은 종교의식이 한창이다. 배를 타고 한가운데로 나아가 푸자(장례의식)를 경건하면서도 조용히 바라본다. 생로병사. 그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부처님께서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던가. 종교를 떠나 모든 인도인은 갠지스 강에 오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할 만큼. 짧디짧은 삼십분간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무사히 인도여행을 마쳐가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참, 여행 가방은 다시 돌아왔다. 삼 일 만에. 크게 머리를 다치지 않았고 저렴한 가격에 현지 전통의상도 한 벌 사왔고 실크도 샀다. 모두가 사 오는 저렴한 현지화장품도 사왔으니 무난한 여행이었다. 아니 성지순례였다. 현지가이드와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들어와 가방 무게를 잰다. 15kg. 전날 호텔에서 잰 몸무게는 2kg이 빠져있었고 모두 7kg을 인도에 남겼다. 내 삶에서 빠져나간 7kg 만큼보다 더 한 울림이 남았다. 인도에는 수많은 삶이 있었다. 부처님이 2,600여 년 전 궁금해하셨던 그 모든 것과 내가 궁금해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해답을 구하는 일. 내가 불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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