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화두 - 자연의 섭리(攝理)
종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은 종소리가 출근하려는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워 자세히 보니 울안, 자그만 텃밭에 댓가지 지지대를 타고 한 키를 자란 더덕이 소문도 없이 꽃을 피워 예고도 없이 미종을 울려 대고 있다. 그래, 더덕꽃이 필 때구나, 하지만 화들짝, 화사하게 도라지꽃도 필 때이기도 하지. 언제나 그 도라지 보랏빛에 밀려 먼 발치에 서서 보아주는 이 없는 쓸쓸함을 은근하게 견디며 오두마니 서 있더니, 오늘은 웬일로 빼꼼이 얼굴을 들어내고 피어 심금을 울려 대고 있는 건지. 지금쯤 어답산 자락 횡성에 가면 그 너른 비탈 밭 가득, 더덕꽃이 무진 무진 피어나고 있겠다. 봄날, 내 어머니가 옥수수 알갱이를 종댕이 가득 채워 허리에 차고, 뱀 똬리같은 고랑을 힘겹게 움직이며 씨를 뿌리던 거친 손길을 뒤로, 강냉이 농사가 너무 힘들다며 아버지 우격으로 더덕밭을 일구어 짭잘하게 소득을 올리던 시절, 한 관, 두 관, 더덕을 캐 읍내 공판장에 납품을 하고 그 돈을 들고 노름판으로 가셔서 사 나흘, 소식도 없으시더니 달빛 어스름 동구 밖으로 지푸라기에 조기 두 마리 꿰어 어깨에 메고 "오늘도 걷는 다 마는..." 갈지 자로 구성지게 유행가를 뽑아 대며 어휴, 우리 맞 상주 오셨는가, 손짓을 하며 멋 적어 하시던 아버지. 그래! 그 더덕꽃이 피었어. 세상 사람들은 밝은 달밤에 소금을 뿌려 놓은 듯, 강원도 신리에 하얀 도라지 꽃밭과 봉평에 메밀꽃 밭이 좋다고 얘길 하지만, 나에게는 드러내지 않고 수줍어 옷고름을 입가에 지그시 물고 은근하게 미소를 보내는 시골 처녀같은 엷은 미색의 환한 달밤, 더덕꽃밭 만큼은 아니더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봉오리를 앙다문 채 죽어도 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더덕 꽃, 마음이 변했나? 어느 날 문득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준비도 없는 내게 와락 달려들어 앙다문 얼굴을 열어 두 볼을 부벼 대면 그렇게도 봉우리 앞에서 마음 졸이던 여름날의 안달은 일초도 못 버티고 마음 한 자락 `와락` 무너지겠다. 봉선화가 지고 난 뒤 아슬아슬 맺힌 씨방을 터트리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고 하지만, 김매기 하러 더덕밭에 내 몰려 파란 하늘을 쳐다 보고 신세타령 하다가 몰래 웅크려 앉아 꽃망울을 `투둑` 터트리는 재미는, 봉선화는 지고 난 뒤에 삶을 포기한 씨방의 자폭 소리지만, 더덕은 꽃이 피기전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버티고 있는 이 여린 꽃송이가 열리는.. 하여 신비롭기까지 한 천상의 소리,이를 어디에 비할 까?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두드려 대는 통에 이 밤에도 더덕꽃 몇 송이는 어쩔 수 없이 또, 제 몸을 열어 세상을 만나고 고독한 미종소리를 내겠다. 덕분에 내 마음도 어쩌지를 못하고 종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겠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은근한 더덕 꽃. 더덕꽃. 2011.8.7 집 앞 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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