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완료] 특집_조계사 하안거 회향 생명살림기도
- 노희순 (자유기고가)
- 2022년 07월호
마이산의 정기가 뭉친 자리, 그 열반의 세계 백제의 고찰 마이산 금당사
진안 마이산(馬耳山)말의 쫑긋한 두 귀를 닮았다는 진안 마이산(馬耳山). 서쪽 봉우리 암마이봉(687.4m)과 동쪽 봉우리 숫마이봉(681.1m)이 나란히 우뚝 솟구친 마이산의 특이한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이채로워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은 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벼르고 별러서 찾아오지 않는 한, 오가는 길에 들를 일은 거의 없는 매우 궁벽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두 개의 바위 봉우리가 빚어놓은 이색적인 풍경이 널리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명승지로 자리 잡았다. 마이산 도립공원은 1979년 10월 16일 전라북도 도립공원으로, 2003년 10월 31일 명승 제12호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이산은 1억 년 전에 호수의 모래와 자갈이 눌렸다가 솟구쳐 생긴 암봉이다. 암마이봉 정상에서 발견되는 쏘가리와 다슬기 화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곳의 바위들은 특이하게 풍화작용이 바위 안쪽에서 시작되어 표면을 밀어냄으로써 벌집처럼 큰 구멍이 숭숭 뚫린, 타포니(tafoni, 풍화혈) 지형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드문 지질 구조인 타포니는 약 630년 전 이성계 장군이 심었다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와 이갑룡 옹이 쌓은 80여 개의 돌탑과 함께 마이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여행 안내서 미슐랭의 《그린 가이드》에서 최고 점수인 별 세 개를 받은 마이산은 명성답게 이름도 여러 가지다.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의 이름은 용출산이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으로 불렸다. 또한 설악산처럼 계절마다 다른 이름이 있다. 봄에는 안개에 싸인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아서 돛대봉, 여름에는 짙푸른 숲속에 솟아 있는 모습이 용의 뿔처럼 보여서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눈 덮인 들판 가운데 있는 먹물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고 해서 문필봉이다. 나옹암 동굴 법당1400년 고찰 고금당과 나옹 선사 수행 터 나옹암마이산 암마이봉의 정기가 인간세상을 향해 뻗어 오다가 맺힌 자리, 그곳에 백제의 고찰 금당사(金堂寺·金塘寺)가 있다. 금당사(전북 진안군 마령면 등촌리 41/ 마이산 탑로 217)는 조계종 제17 교구본사 금산사의 말사다. 서기 650(백제 의자왕 10)년,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 화상의 제자 무상(無上) 스님과 그의 제자 금취(金趣) 스님이 함께 세웠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보덕 화상의 열한 제자 가운데 금당사를 창건한 무상 스님을 맨 앞에 거론하고 있다. 맏상좌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보덕 법사에게는 뛰어난 제자가 열한 명 있었다. (그 중) 무상(無上) 화상이 제자 금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다……” 금당사는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바위 봉우리에 있었던 것 같다. 고금당(古金堂, 금동사) 또는 자연 동굴 법당이라는 뜻에서 혈암사(穴巖寺)로도 불렸다. 고금당에서는 마이산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금당사도 내려다보인다. 고금당과 나옹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고금당은 바위 위에 있고 나옹암은 바위 중간 자연 굴에 자리 잡고 있다. 고금당 오르는 길이 좀 힘들긴 하나 꼭 한 번 참배할 것을 권한다. 마이산 입구 남부주차장에서 매표소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가다가 왼쪽에 세워진 고금당 안내 푯말을 따라 산을 오르면 된다. 경사가 험한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지만, 흘린 땀에 비해 훨씬 더 큰 환희심을 맛볼 수 있다. ‘천상굴’로도 불리는 나옹암은 동굴 법당임에도 화사하고 은은하며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나옹 스님(1320~1376)의 수행 터인 이곳에서 이성계 장군은 신인(神人)에게서 금척(金尺, 왕권 상징물)을 받는 꿈을 꾸고 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이 신령스런 나옹암이 ‘나옹화상낙도가(懶翁和尙樂道歌)’, 일명 〈토굴가〉를 탄생시킨 곳으로 전해온다. 그 일부를 적어본다.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 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송문(松問)을 반개(半開)하고 석경(石耕)을 배회(徘徊)하니녹양(綠楊) 춘삼월하(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정전(庭前)의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 중략 --석호(石虎)는 무영(舞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 제무착령(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 靈山會上 佛菩薩). 마이산 금당사 일주문보덕 화상의 사상을 잇는 열반종 중심 사찰금당사 초입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고 글을 써 새겼다는 주필대(駐蹕臺)와 단군, 조선조의 태조, 세종, 고종 등 네 분을 모신 국내 최대의 사당 이산묘를 관람할 수 있다. 금당사는 마이산 매표소에서 손을 뻗으면 일주문에 닿을 것처럼, 관광지 상가와 거리가 매우 가깝다. 하지만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지장전, 삼성각, 나한전, 괘불전 등의 배치가 단아하고 정갈해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창건주 무상 스님과 금취 스님은 열반경의 대가인 스승 보덕 화상의 법을 이어받아 금당사를 열반종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보덕 화상은 본디 고구려의 고승이다.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이 도교 우대정책을 펴자 이에 반대해서 백제로 옮겨 왔다. 전주 근방 고덕산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는 거처를 마련했는데, ‘고구려에서 날아온 암자’라는 뜻이다. 보덕 화상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열반경 사상을 전파한다. ‘노예도 천민도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는 대승불교의 ‘평등사상’이 백제 땅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덕 스님의 이 평등사상이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에게로 이어졌다면서, 그 증거로 『열반종요』라는 원효 스님의 저술을 예로 드는 이들도 있다. 이후 보덕 스님의 제자들이 계룡산 신원사, 문경 대승사, 모악산 대원사, 마이산 금당사 등 열반종 8대 사찰을 전국에 건립함으로써 열반경 사상이 꽃을 피우게 된다. 금당사 전경금당사의 전각과 성보들극락보전은 서기 650년(금동사 혹은 혈암사) 창건 당시 지은 전각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다. 숙종 1년 다시 지으면서 절 이름을 금당사로 바꿨다. 왜란 당시 금동사에 승군사령부가 설치되어 승군을 지휘했는데, 승군 전체가 전멸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극락보전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650년 조성된 이 목조삼존불은 삼존불 중에서 본존인 아미타불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금당사는 성보박물관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금당사가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는 총 네 종류다. ‘금당사괘불탱(보물 제1266호, 괘불전)’을 비롯해서 작년 12월에 보물로 지정된 ‘강진 무위사 감역교지(減役敎旨)’, ‘금당사목불좌상(전북 유형문화재 제18호)’, ‘금당사석탑(전북 문화재자료 제122호)’ 등이다. 금당사 괘불탱에는 나옹 스님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가뭄이 꽤나 심했던 어느 해 봄,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금당사에 찾아가 하소연했다. 너무 가물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사정을 듣고 난 금당사 스님은 기우제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는 호랑이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흘 뒤에 돌아온 스님은 절 뒷마당에 사람 형상을 그려놓더니 그곳을 파라고 했다. 그 땅속에서 한 폭의 괘불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그 괘불을 높이 걸고 기우제를 올리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스님이 바로 나옹 스님이라고 전해온다. 현재 이 괘불은 금당사 서쪽 괘불각에 모셔져 있다. 다만 이 탱화는 조선 숙종 18년(1692)에 화가 명원(明遠) 등 네 명이 그린 작품으로 파악되어, 14세기 인물인 나옹 스님과는 시대적인 거리가 있다. 이 탱화는 17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의미가 큰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작년 연말에 지정된 ‘강진 무위사 감역교지’다. ‘감역’이란 잡역을 면제하거나 줄인다는 것인데, 억불정책을 펴던 조선 초기에 세조 임금이 직접 강진 무위사의 잡역을 면한다는 명령서를 내렸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세조의 서명인 어압(御押)과 ‘시명지보(施命之寶)’의 어보(御寶)가 명확하게 남아 있어, 조선 초기의 고문서 양식 및 사찰 정책, 경제사와 불교사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금당사석탑은 전북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심하게 파손되어 3층~5층만 본래 부재가 남아 있고, 기단부와 상륜부 등은 다른 돌로 대체했다. 금당사 괘불전 왼쪽 담 아래, 미륵불 앞쪽에는 작은 연못인 ‘금당 영지’가 있다. 절 주변에 바위가 많아서 터가 오래가려면 물이 흘러야 좋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금당사의 ‘당(堂)’을 ‘당(塘)’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작은 연못’을 가리키는 한자다. 절 이름으로 ‘금당(金塘)’이라는 한자를 쓸 때는 이 ‘금당 영지’ 존재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금당사 입구 오른쪽에는 금당사템플스테이관이 있다. 지난 2021년 3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으로부터 ‘2021 템플스테이 정식 운영 사찰’로 지정받은 금당사는 마이산 도립공원 내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사찰로서, 백제 고찰의 역사 문화적 전통과 도립공원의 환경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마이산 걷기 명상 트레킹’과 ‘호흡 명상’ 등을 운영하고 있다. ‘소확행’을 주제로 인근의 청소년 야영장과 연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일 계획이다. 한편 최근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녹두장군 전봉준의 맏딸(본명 전옥례)이 고금당에서 8년간 숨어 지냈다고 한다. 동학혁명 당시 18세였던 그는 수배를 피해 이름까지 바꾸고 당시의 금당사 주지 김대완 스님 양딸로서 공양주로 살다가 혼인하면서 고금당을 떠났다. 이를 주선한 사람이 그의 외삼촌인 경허 스님이었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녹두장군이 종각역에서 사형당한다. 그러나 시신을 수습하면 삼대를 멸하겠다는 관의 엄포에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때 시신을 수습한 이가 경허 스님이다. 스님은 조계사에서 승복을 벗고, 삼수갑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벗어놓은 승복을 무진장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입었고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고 한다. ---조계사 하안거 회향 생명살림기도는 8월 21일(일) 마이산 금당사에서 봉행합니다. 금당사 극락보전금당사 목불좌상(전북 유형문화재 제18호)금당사괘불탱(보물 제1266호)금당사석탑(전북 문화재자료 제122호)미륵불 앞쪽에 있는 작은 연못인 ‘금당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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