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완료] 천년숲 사찰기행
- 노희순 (자유기고가)
- 2023년 12월호
햇살과 바람, 사찰이 일군 속리산 법주사 세조길 부처님 가르침이 자리한 정토에 세조의 발자취 따라 펼쳐지는 소나무 숲길
때는 조선왕조 세조 10년(1464) 2월 18일, 아직은 바람 자락에 찬기가 묻어 있는 이른 봄이었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재위 1455~1468)의 어가 행렬이 궁궐을 나와 남쪽 지방으로 향했다. 500여 명의 수행원이 뒤따르는 엄청난 규모의 행차였다. 악화된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나선 길이었지만, 또다른 목적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 현재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는 자신의 스승 신미 대사(1403~1480)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560년 전, 스승을 찾아 속리산에 오른 세조 임금혜각 존자 신미 대사는 2019년 개봉된 영화 〈나랏말싸미〉를 통해 새롭게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떠오른 세종(재위 1418~1450) 당시의 뛰어난 언어학자다. 티베트어, 범어(산스크리트), 파스파어(원나라 말) 등 다섯 가지 언어에 능통했던 스님은 출가 전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깊이 관여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기초작업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 《월인석보》 등의 편집을 주도했으며, 《원각경언해》, 《능엄경언해》 등 수십 권의 불교 경전과 고승 법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서 간행했다. 세종과 문종,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신미 스님에 대한 유학자들의 질투는 요란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信眉)’를 검색하면 모두 136건이 나오는데, 대부분이 욕설과 비방이다. 세종이 내린 법호 가운데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뜻)’라는 말을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쓰지 못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훈민정음 보급에 힘을 보태면서 신미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병마에 시달리자 세조는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수많은 원혼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고,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양양 낙산사, 양주 회암사 등을 중창하거나 새로 짓는 데 국고를 아끼지 않았다. 왕사인 신미 대사의 영향도 컸다. 속리산 법주사와 복천사도 그 절들 가운데 하나였다.세조와 신미 대사의 발자취 따라 걷는 세조길속리산 말티재 아래 ‘대궐터’에서 하룻밤을 머문 세조는 이튿날 아침 말을 타고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마침내 속리산 들머리 평지에 도착한다. 그때 길가에 서 있는 기품 있고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신기하게 그 소나무는 스스로 넓게 퍼진 가지를 들어올려 세조가 탄 연(輦)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준다.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정이품 벼슬을 내리니, 그 유명한 ‘법주사 정이품송’(내속리면 상판리)이다. 세계적 희귀 수종인 망개나무(내속리면 사내리 산 1-1)와 함께 속리산 법주사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어가는 2월 27일 법주사에 도착한다. 한양을 떠난 지 열흘 만이었다. 2월 28일 숙부인 효령 대군과 사위 정현조(정인지의 아들), 신숙주, 신미 대사의 동생 김수온과 함께 복천사에 오른 세조는 스승인 신미 대사를 만나고 복천사 법회에도 참석한다. 그때 신미 대사를 만나기 위해 세조가 오고간 길, 법주사 일주문에서부터 복천암까지 이어진 3.2킬로미터의 숲길이 2016년 9월 세조길로 다시 태어났다. 법주사 주차장에서 법주사까지, 법주사 계곡 달천 주변 약 2킬로미터에 걸쳐 조성된 ‘법주사 오리숲’의 나무들은 숲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어 한 아름 넘는 것들이 많다. 다만 명성 높은 법주사 들머리 소나무숲 곳곳에서 참나무 등 활엽수에 밀린 소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세조길이 시작되고, 신선대 방향과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법주사 세조길 법주사 중창조 벽담대사비와 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 법주사 일주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된 법주사 일원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2009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되었다. 속리산 천왕봉(1,058미터)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제곱미터(5,623,475평)가 이에 해당한다. 속리산의 법주사 산림은 2,156헥타르(6,521,900평)로서, 조선 순조 임금의 태실 위치와 법주사 주변을 상세히 그린 태봉산 그림이 왕실에 전해온다고 한다.절 입구에 법주사 중창조 벽담대사비와 나란히 서 있는 ‘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 내용이 흥미롭다. 헌종 때 송시열이 쓴 글을 새긴 비문에는 속리산이 명산이라는 사실과 수정봉 거북바위에 관한 전설이 적혀 있다. 당나라 태종이 수정봉 거북바위가 당나라 재물을 빼앗아간다고 믿고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고 등에 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 훗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북 목을 다시 붙이고 등의 탑을 허물었다고 한다. 법주사를 품은 속리산의 ‘속리(俗離)’는 속세를 떠난다는 뜻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수행 터를 찾아다니던 진표 율사가 속리산 근처에 이르렀는데 밭을 갈던 소들이 스님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스님을 따라 속세를 버리고 입산함으로써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義信)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인도 유학을 마치고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돌아오던 의신 스님은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자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고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전란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허나 《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놓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머물 때 속리산의 영심(永深) 스님 등이 찾아와 법을 전수받으니,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의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두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라”고 당부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이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현 법주사를 영심 스님이 창건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 속리사로 불렸으며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시가 실려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훗날 법주사로 바뀐 것으로 짐작하나 정확한 기록은 아직 못 찾고 있다.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과 고려 태조 1년(918)에 중건되었으며, 고려 문종 때 도생 승통(導生僧統) 스님이 중창에 힘을 쏟았다. 도생 스님은 복천암 중창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는 임진왜란 때 모든 산내 암자가 불에 타버렸다. 인조 4년(1626) 벽암 각성(碧岩覺性) 선사가 중창에 힘썼으나 20여 동만 복구되었다법주사 금동 미륵대불과 팔상전(국보) 천왕문 앞 전나무국내 하나뿐인 목조탑 팔상전을 비롯,국보와 보물이 가장 많은 절 고려 왕건과 공민왕, 조선 세조 등 여러 임금이 찾았을 만큼 번성했던 법주사는 한때 스님만 3천 명이 넘게 상주했다. 이를 증명하듯, 경내에 높이 120센티미터, 지름 270센티미터, 두께 10센티미터, 무게 20톤에 달하는 철솥이 남아 있다. 이 무쇠솥에 쌀을 부으면 40가마가 다 들어가고, 국을 끓이면 수천 명이 먹을 수 있었다. 법주사는 문화재 아닌 것을 찾는 게 쉬울 만큼 국보와 보물이 많은 절이다. 국보로는 국내 단 하나뿐인 목조 5층탑인 팔상전을 비롯해서,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과 석련지 등 세 점이 있다. 마애여래의상, 사천왕석등, 신법 천문도 병풍, 대웅보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원통보전과 목조관음보살좌상, 철솥, 석조희견보살입상, 법주괘불탱화, 동종, 복천암 수암화상탑 등 보물도 열세 점에 이른다. 이 밖에 도유형문화재(22점)와 문화재자료(2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법주사의 상징은 뭐니뭐니해도 거대한 금동 미륵대불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미터의 기단 위에 세워진 약 25미터의 거대한 미륵불은 국내 최대 크기로, 약 160톤의 청동이 들어갔다. 기단부 안의 벽면에 13개의 미륵십선도 부조가 있다. 2002년 개금불사를 회향했다. 법주사에서 문화재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게 있다.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간 천왕문 앞 전나무 두 그루와 대웅전 앞의 보리수 두 그루다. 오래된 사찰일수록 전나무가 많은데, 그 이유를 당나라 조주 선사의 화두 ‘정전백수자(뜰 앞의 잣나무)’와 연관 지어 이해하기도 한다. ‘백수자(柏樹子)’는 잣나무나 측백나무인데, 스님들이 두 나무 대신 모양이 비슷한 전나무를 심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물인 법주사 대웅보전은 정면 일곱 칸, 옆면 네 칸의 큰 건물이다. 모셔놓은 소조비로자나 삼불좌상도 내부를 꽉 채울 만큼 규모가 크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석가모니불, 오른쪽에 노사나불을 모셨는데, 안내판에는 노사나불 대신 아미타불이라고 적어 놓아 혼란스럽다. 이 대웅보전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3대 불전으로 손꼽힌다. 세조의 피부병을 고쳐준 ‘목욕소’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보물 제1416호) 복천암세조의 피부병을 고쳐준 ‘목욕소’ 세조길은 야자잎으로 엮은 매트와 나무데크로 되어 있다. 저수지 위쪽 멀리 산등성이로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저수지 왼쪽 가장자리로 5월에 꽃이 피는 등나무길이 나 있다. 달천을 건너 오른쪽이 야자매트를 깐 단풍계곡길이고,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면 탈골암 가는 길이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세심정이 나오는데, 조금 못미쳐서 세조가 목욕했다는 물웅덩이 ‘목욕소’가 보인다. 세조는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을 고쳤다고 한다. 세심정에서 복천암까지는 500미터, 짧은 거리지만 ‘이뭣고다리’부터 경사가 가팔라져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 왼쪽 산봉우리가 조선 순조의 태실이 묻힌 태봉이고, 오른쪽 산자락에 복천암(福泉庵)이 자리잡고 있다. 세조길은 여기서 끝이 난다. 신미 대사의 수행처, 복천암 사적기에 따르면,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었고, 세종 31년(1449)과 고려 태조 1년(918) 등 몇 차례 중창되었다고 한다. 작은 암자이긴 하나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 등 두 기의 보물과 도 지정문화재 네 점이 있다. 복천암의 중심 건물인 극락전 안에는 세종이 하사한 아미타삼존불상과 신중탱화, 후불도가 남아 있다. 신미 대사의 입상 영정도 눈에 띈다. 조선 중후기에 지어진 극락전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건립된 희귀한 건축양식으로, 전국에 20여 동밖에 없다고 한다. 복천암에서 꼭 봐야 할 것을 꼽으라면 보물인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이다. 복천암 오른쪽 능선의 명당 터에 스승(수암 화상)과 제자(학조 화상)의 부도가 나란히 서 있어 이채롭다, 수암 화상이 곧 신미 스님이다. 부도밭 한쪽에 비스듬히 놓인 싸리비 두 자루가 마치 좌탈입망한 수행자의 모습 같아서 자못 경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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