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완료] 천년숲 사찰기행
- 노희순 (자유기고가)
- 2023년 09월호
555년간 지켜온 국내 최고의 천연 숲 햇살과 바람, 사찰이 일군 숲, 광릉 봉선사 비밀의 숲
무자비한 폭염이다. 그늘이 없는 곳에 잠시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따가운 햇볕에 눈앞이어지럽다. 간간이 부는 바람조차 열기를 더해줄 뿐 더위를 식히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역대 최고의 폭염이라는데, 경기도 광릉 봉선사 앞 연못 주변은 평일의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다. 제철 연꽃을 보러 온 사람들이 청사초롱으로 꾸며놓은 연못가를 거닐며 그 청아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를 즐기고 있다. 제 아무리 따가운 햇볕도 진흙 속에서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의 의연함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푸르고 무성한 연잎과 그 사이로 수줍은 듯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들이 두 개의 연못에 가득했다. 위쪽 연못에는 우아한 백련들이 줄기를 세워 흰 꽃을 피우고 아래 연못에는 연한 분홍빛 연꽃과 백련이 어우러지며 꽃대를 일으키는 중이다. 특히 깊고 그윽한 백련의 향기는 멀리 산문 밖까지 퍼져 나간다. 오래 전 운악산 초입에서 그 백련 향기에 이끌려 일주문을 들어서던 기억이 난다. 연꽃은 그렇게 봉선사의 명물로 자리 잡았고, 해마다 연꽃 축제가 열리면서 어느덧 봉선사의 상징처럼 되었다. 『유마경』에서는 연꽃의 속성을 ‘높은 언덕이나 육지에서는 연꽃이 나지 않고(高原陸地 不生蓮花), 낮고 습한 진흙에서 이 꽃이 난다(卑濕淤泥 乃生此華).’라고 했다. 낮고 더러운 늪지대에서 자라지만 연꽃은 더없이 맑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특성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상과 일치하는 까닭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사랑받고 있다. 교종 본찰 ‘운악산 봉선사’의한글 편액 이야기평지 가람인 봉선사는 출입이 매우 편하다. 광릉수목원로(98번 국도) 옆의 산 초입에서 바로 큰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버스정류장이 바로 코앞이고, 일주문 안쪽에는 무료 주차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네 개의 기둥에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 편액을 건 봉선사 일주문은 2005년 완공된 다포식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따랐다. 이 한글 편액의 글씨는 운허 스님(1892~1980) 친필을 집자한 것이다. 봉선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씨는 ‘큰법당’이라는 대웅전 한글 편액이다. 한글로 쓰인 국내 최초의 편액인데, 경전 한글화를 이끈 운허 스님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1970년 대웅전을 새로 지을 때 금인석 서예가에게 주련 글씨와 함께 받았다. 교종 본찰의 큰법당답게 삼면 벽에 동판에 새긴 한글 법화경 125장(동쪽)과 한문 법화경 227장을 붙여 놓았다. 큰법당과 조사전의 주련도 한글로 쓰여 있다. 운허 스님의 번역문을 석주 스님(1909~2004)이 한글로 썼다. 운허 스님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흥동학교 등 민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다. 출가한 다음에는 불교 교학 발전과 근대화에 매진하는 한편, 한문 경전의 우리말 번역 불사에 평생을 바쳤다. 1961년 불교 사전을 최초로 펴냈고, 고려대장경의 우리말 완역을 발원하며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했다. 그 한글대장경 편찬 불사는 37년 만인 지난 2001년, 얼마 전에 입적한 월운 스님의 주도로 회향했다. 1446년 수양대군 시절, 최초로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짓고, 왕위에 올라 『월인석보』를 펴낸 세조(1417~1468)의 능침사찰이 경전 한글화의 본찰격인 봉선사라는 사실이 우연이라기에는 묘하게 신기하다.이 밖에도 마당의 정중탑(삼층석탑)과 큰법당 뒤쪽 화계석축도 눈여겨볼 만하다. 국립박물관의 갈항사탑을 모방한 정중탑에는 1975년 운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화계석축은 계단식 화단으로, 경복궁 교태전(왕비 숙소) 뒤쪽 아미산이라는 정원을 본땄다고 한다. 각으로는 관음전, 지장전, 방적당(放跡堂), 조사전, 삼성각, 청풍루, 판사관무헌 등이 있다. 운악산 봉선사 한글 현판 한글 현판과 주련 봉선사의 산 역사,수호목 느티나무교종 본찰 봉선사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로, 서기 969년(고려 광종 20) 법인(法印)국사 탄문 스님이 운악사(雲岳寺)로 창건했다. 1469년 세조가 죽자 정비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정하고, 가까운 운악사를 능침사찰로 삼았다. 이때 89칸으로 중창하면서 ‘봉선사(奉先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물인 봉선사 동종이 이때 조성되었다. 당시 왕실에서 똑같은 종을 두 개 만들어 한 개는 낙산사로 보냈는데,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불타서 녹아버렸다. 조선 전기의 범종 양식을 잘 보여주는 봉선사 동종은 현재 범종각 아래층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 교종 수사찰이 된 봉선사에는 승과고시를 치르던 승과원(僧科園)이 있었다. 서산 대사, 사명 대사 등이 승과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를 내걸었던 당간지주(1469년)가 남아 있다. 장군소로 불리는 경내 작은 못가의 석조 관세음보살상이 이채롭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작가(서울대 전 교수)의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상과 분위기가 비슷한데,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도 이 작가의 작품이 모셔져 있다. 종교 화합을 상징한다. 봉선사는 광릉의 능침사찰인 덕분에 사세를 비교적 잘 유지해왔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의 병화는 피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창했으나, 1.4 후퇴 때 봉선사에 진을 친 중공군 때문에 미군의 집중폭격을 맞았다. 삼성각만 남기고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16동 150칸의 대가람이 재가 되었다. 지금의 봉선사는 1960년대 운허 스님의 불사로 이뤄졌다.그런 연유로 봉선사 보유 문화재는 두 기의 보물(동종, 비로자나삼신괘불도)과 한 기의 도문화재자료(목조아미타불)뿐이다. 그 중 ‘비로자나삼신괘불도’는 큰 야외행사 때 거는 탱화로, 서기 1735년(영조 11)에 상궁 이성애가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시주했다. 는 기록이 그림 아래쪽에 적혀 있다. 절 입구에서 부도밭을 지나 청풍루에 이르기 전,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전쟁과 화마의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의연히 서 있다. 정희왕후가 동종을 봉안하던 해(1469)에 심은 느티나무다. 남편 세조를 향한 마음이 555년 지난 지금도 봄마다 푸릇한 새잎으로 돋아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옆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로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조선 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하마비라고 한다. 멀리서 다경실(茶經室)을 바라보다가 지난 6월에 입적한 월운(月雲) 조실스님 생각이 났다. 다경실은 운허 스님 뜻을 이어 경전 번역과 후학 지도에 평생을 바친 월운 스님의 처소였다. 사십구재가 며칠 뒤여서 생전의 유쾌한 웃음을 떠올려봐도 자꾸만 목젖이 서걱거렸다. 봉선사 석탑 봉선사 동종(보물) 정희왕후가 심은 느티나무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광릉보다 더 오래 숲을 지킨 봉선사광릉 숲은 본디 조선 왕실의 사냥터였다. 1468년 세조의 능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사방 15리(6킬로미터)가 능림으로 지정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출입을 통제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131배(3만 8,000여 헥타아르)나 되는 숲이 나무를 베거나 나물을 캘 수 없는 곳,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되었다. 덩달아 능침사찰 봉선사 주변의 숲도 포행하는 봉선사 스님들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보존림으로 지정되어 계속 보호받았다. 그렇게 550여 년간 왕실과 국가의 보호를 받은 광릉 숲은 훼손되지 않고 천연 자연림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숲은 식물 946분류군, 조류 180종, 포유류 32종, 곤충류 3,986종의 서식처가 되었다. 대표적인 희귀종 식물인 광릉요강꽃을 비롯해서, 하늘다람쥐와 장수하늘소, 까막딱따구리 등 20여 종의 천연기념물도 깃들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생물이 사는 곳이 광릉숲이다. 그 식물 다양성 때문에 2010년 유네스코에서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선정했다. 설악산, 제주도, 신안 다도해에 이어 국내에서 넷째 번으로 선정된 것이다. 광릉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 왕릉이므로, 광릉을 품은 광릉숲은 세계적인 생물권보존지역인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이다.많은 이들이 광릉숲이 광릉 덕분에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광릉보다 앞서서 그 숲을 지켜온 건 운악사, 즉 사찰과 그곳 스님들이다. 그 한가운데 낭혜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 봉선사에 진을 쳤던 왜군이 퇴각을 앞두고 봉선사와 주변 숲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시 주지였던 낭혜 스님은 대웅전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소리 높여 독경을 시작했다. 대웅전과 함께 불타 죽을 결심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독경이 끝나지 않자 왜군들이 할 수 없이 물러갔다.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탔으나 대웅전은 화를 면했다. 주변의 숲도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봉선사 광릉숲길과템플스테이 포행 길 ‘비밀의 숲’봉선사 광릉숲에 지난 2019년 산책길이 생겼다. 광릉숲의 둘레길로, 봉선사 입구에서 광릉 입구를 거쳐 국립수목원 입구까지 이어진다. 총 2.9킬로미터에 달하는 나무데크 길인데, 천천히 걸어도 1시간 40분가량이면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전에는 광릉숲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통제도 심했고 길 또한 좁은 왕복 2차선 찻길뿐 인도가 따로 없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테마별로 열 개의 작은 정원이 만들어져 난간안으로 걸으면서 편하게 주변의 나무와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숲속정원, 돌담정원, 습지정원, 쉼터정원, 그늘정원 등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테마에 따라 달라지는 작은 정원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에는 왕실 가족들에게만 허락된 길이었다. 작년까지는 여름과 겨울, 아침과 저녁시간 등이 제한적이었다. 동식물들을 쉬게 하려고 가로등도 달지 않았었다. 그런데 올해 4월부터 나머지 부분까지 완전히 개방되어 난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광릉숲을 마음 놓고 기웃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광릉숲 못지않게 아름다운 봉선사천이 걷는 내내 숨었다가 다가오기를 반복하면서 시원한 물소리와 탁 트인 풍경을 선물한다. 광릉숲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봉선사 비밀의 숲이다. 봉선사 연못 위쪽의 연수당 앞마당을 가로질러 개울을 건너야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숲 산책은 봉선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그것도 반드시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봉선사 비밀의 숲은 조선시대에는 왕실 가족들만 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468년부터 지금까지 555년간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던 만큼, 자연림, 천연림 그 자체였다. 스님들만의 포행 길이었던 비밀의 숲이 이제 템플스테이의 걷기 명상에 포함되면서 참가자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고맙게도 봉선사에서 활동하는 조계종 포교사단 불교문화해설 3팀의 안내로 비밀의 숲을 만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을 걸으면서 천혜의 자연림에 흠뻑 빠져보는 체험, 봉선사 템플스테이만의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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