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완료] 주지스님과 함께하는 화엄성중 가피순례
- 노희순 (자유기고가)
- 2022년 09월호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 백제의 고찰 추줄산 위봉사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연꽃 향기 아련한 백화도량 송광사(松廣寺) ‘조금만 더 일찍 올걸.’완주 송광사 입구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절 담장 옆, 종남산 산기슭에 넓게 펼쳐진 연밭에서 꽃피울 때를 넘긴 연꽃 몇 송이가 바람을 타고 살랑이고 있었다. 꽃은 많이 흔들릴수록 그 향기를 멀리까지 보낸다고 했던가. 그 새삼스런 깨달음을 위안 삼으며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 일주문 앞에 섰다. 백화도량(白花道場) 송광사(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다. 백화도량이라 함은 송광사가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절’, 곧 자비도량이라는 뜻이다.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와 한자까지 똑같은 완주 송광사가 기록에 처음 드러나는 건 통일신라 말이다.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수행하던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종남산 백련사(白蓮寺)가 영험한 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송광사보다 먼저 ‘백련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백련사 창건은 송광사 사적비 등에 따르면, 서기 583년 도의 국사(?~825)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신령스런 샘물이 솟는 것을 보고 그 옆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당나라에서 선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한 보조체징 선사가 가지산 보림사와 이곳 백련사에 번갈아 머물면서 선종 사찰에 맞게 송광사로 바꾸었다(867)고 한다. 하지만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1055~1101)스님이 송나라에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송광사를 천태종에 귀속시키면서 다시 ‘백련사’로 바꾸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각이 다 불타버려 폐사지로 남게 된다.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1636년) 등에 따르면,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인 1622년 능양군(훗날 인조)의 척족(戚族)인 이취반(李就潘)이 절 터를 시주했고, 이듬해 법당 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 불사는 벽암각성(1575~1660) 스님 문도인 덕림 화상이 주도했고, 승명·응호 스님 등이 15년에 걸쳐 어렵게 이끌어 1638년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2층) 구조인 대웅전을 웅장하게 지었다. 대웅전 낙성과 삼존불 점안의 증명법사는 당대 최고 도인으로 존경받던 진묵(1562~1633) 대사가 맡았다. 벽암각성 스님이 초대 주지로 부임해서 선수행을 계승하자 인조가 ‘조선선종수사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후 명부전(1640년), 천왕전(1649년), 나한전(1656년), 일주문 등이 지어져 세 번째 중건이 이뤄졌고, 1707년과 1857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중건 불사가 있었다. 다섯 번째 중건은 정일 선사가 주도했다. 이미 사세가 기울어 장인 53명을 동원해서 49일이나 걸려 해체했던 웅장한 대웅전을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규모로 대폭 줄여 7개월 만에 지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중건은 지난 2000년 현재 회주인 금산도영 대종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송광사 일주문송광사 사천왕상(보물 1255호)송광사 범종루(보물 1244호) 여섯 차례 중건한 고찰, 곳곳에 보물(4점)과 유형문화재(8점) 종남산 자락에 터를 잡은 지 1,400여 년, 송광사는 조선시대에 두 번의 왜란과 두 번의 호란으로 전각이 불타 없어지는 등 폐사가 된 적도 있으나, 지켜낸 보물과 문화재가 12점(보물 4, 유형문화재 8)이나 된다. 대웅전(보물 1243호), 대웅전 소조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1274호), 범종루(보물 1244호), 천왕전과 소조 사천왕상(보물 1255호) 등의 보물 4점이 있고, 일주문, 금강문, 나한전, 나한전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 동종, 송광사개창비, 지장전 소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 대웅전 목조 삼전패 등 유형문화재가 8점이다. 차분히 일주문 앞에 서보자. 백제형 평지 사찰인 송광사는 시력만 좋으면 일주문 앞에서 대웅전 부처님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그리고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주문(시도유형문화재 제4호)은 194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는 남쪽으로 3킬로미터 바깥쪽인 ‘나드리’라는 곳에 있었는데, 절 땅이 줄어들어 좀더 안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금강문(시도유형문화재 제173호) 양쪽에는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서 있고 문수 동자와 보현 동자도 그 옆을 지키고 있다. 보물 제1255호 ‘소조 사천왕상’을 모신 전각은 일주문 방향에는 ‘천왕문’ 편액이, 대웅전 방향에는 ‘천왕전 ’편액이 각기 다른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천왕전’ 편액과 여닫이문 설치로 인해 전각의 격이 높아짐을 알 수 있다. 이 사천왕상은 진흙으로 빚은 국내 사천왕상 중 가장 오래(1649)되었고, 소조상의 제작기법과 체형 특징, 조형성 등에서 손꼽힐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 적힌 ‘1649년 조성’되었다는 글과 왼손에 든 보탑 밑면의 ‘1786년 새로 보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해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특이하게 송광사에는 ‘흙으로 빚은〔소조〕’ 불상이 많다. 대웅전, 지장전, 천왕전 등에 모셔진 ‘소조’라는 글자가 붙은 불상들이다. 대웅전의 석가여래불(550cm), 아미타불(520cm), 약사여래불(520cm) 등은 흙으로 빚은 불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이 삼세불은 모두 인조 19년(1641)에 조성되었다. 그 큰 삼존불 사이에 세워진 ‘목조 삼전패’(시도유형문화재 제170호)에는 각각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저하수천추’라고 적혀 있다. 인조 임금과 그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의 조속 귀환을 비는 슬픈 내용이다. 목조 삼전패 중 세자전화수천추 송광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1274호)승군 700여 명이 머문 호국도량,대웅전의 ‘땀 흘리는 아미타부처님’ 송광사 경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은 대웅전과 범종루다.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다른 사찰 대웅전과 달리 네 벽에 네 폭의 비천상을 그려 넣었고, 네 방향마다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앞면은 대웅전, 오른쪽은 유리광전(琉璃光殿), 왼쪽은 무량수전(無量壽殿), 뒷면에는 보광명전(普光明殿) 편액이 걸려 있다.범종루는 송광사 전각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특이하다. 아(亞)자형 평면 2층 누각인데, 십(十)자형 평면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런 형태는 진신사리를 모신 보궁이나 대궐에만 사용한다. 국내에서 유일하며 1814년이나 1857년에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전체적으로 작고 섬세하게 조각해서 한국 전통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다.송광사 대웅전에는 나라에 어려움이 일어날 때면 땀을 흘리는 불상이 있다. 아미타여래 좌상이다. 1991년 2월 대웅전 바닥이 축축할 만큼 땀을 흘렸는데, 당시 시위 중인 한 대학생이 경찰에게 맞아 죽고 10여 명의 대학생들이 분신하는 사고가 생겼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때와 1996년 북한 잠수함이 나타났을 때도 땀을 흘렸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런 신기한 일은 송광사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송광사는 병자호란(1641) 때 전주사고(조선왕조실록 보관고)를 지키는 승군 700여 명과 승군장 벽암각성 스님이 머문 호국도량이었다. 송광사는 4대 지장성지 중 한 곳인 동시에 나한기도가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나한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우물천장에 팔작지붕을 올려 규모가 큰 편이다. 목조 석가여래좌상 좌우에 십육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 등을 조성해 놓았다. 지장전은 1640년 건립되었고, 소조 지장보살삼존상과 권속이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위봉사 일주문위봉사 전경세 마리 봉황이 날아든 자리,상서롭고 아름다운 위봉사위봉사(威鳳寺)는 완주 송광사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추줄산 위봉산성 아래에 있다. 위봉산성 안에 열네 개의 절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위봉사만 남았다. 위봉산성을 지키는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하며, 고려시대에는 위봉사(圍鳳寺)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위봉사(威鳳寺)로 바뀌었다고 한다.위봉사는 서기 604년(백제 무왕 5)에 서암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보련(布連) 화상의 〈위봉사극락전중건기〉(1868)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없어 창건연대가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신라 말 최용각(崔龍角)이 봉황 세 마리가 절터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고 옛 절터를 찾아내 절을 지었으며, 1359년(고려 공민왕 8) 나옹 화상이 크게 중창해서 전각 28동, 암자 10여 동의 대가람으로 일궜다는 기록이 있다. 보련 스님은 나옹 스님의 유적을 따라 위봉사에 이르러 당시 극락전을 비롯해서 60여 칸을 중수했다. 1911년에는 선교 31본산의 하나로 전북 일대 46개 사찰을 관할했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1970년대에는 두세 채만 겨우 남아 있었다. 1990년 위봉선원 짓는 것을 시작으로 삼성각, 나한전 중건(1991), 극락전 아미타여래상 조성(1994), 범종각 건립(2000) 등의 불사를 거쳐 오늘날 비구니선원 위봉사의 면모를 갖추었다. 위봉사 일주문은 10여 개의 계단 위에 세워졌다. 현판에는 ‘崷崒山威鳳寺’(추줄산 위봉사)라고 써 있다. ‘崷’는 ‘산이 높다’는 뜻이고, ‘崒’은 ‘산이 험하다’로 풀이한다.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고 한다. 송광사처럼 일주문과 사천왕문, 봉서루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계단을 오르면서 점점 하늘로 향하는 기분이다. 일주문 앞에서 느낀 위압감은 사천왕문까지 이어진다. 사천왕상이 보통 크기에 비해 무척 우람하고 장대하다. 봉서루 계단을 올라서서 절 마당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마음이 편안하게 맑아진다. 마당 한가운데 5백 년 넘은 소나무가 우아하게 휘어진 채 평화롭게 서 있고, 작고 소박한 돌탑이 그 품에 들어 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이는데, 나옹 스님이 절을 중수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위봉선원, 비구니선원이 있을 법한 자리라고 감탄하는 사이, 보광명전(보물 제608호)이 물속에서 떠오르듯 살포시 눈에 들어온다. 완벽하다. 추줄산과 위봉사가 그려놓은 담백한 수묵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누가 이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위봉사 보광명전의 주불위봉사 관음전 백의관음의 상주처 보광명전 위봉산 일대는 2021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세계적 그룹인 방탄소년단의 정국 덕분이다.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곳’이라는 그의 찬사 한마디에 이 깊은 산골이 명승지로 떠올랐다.위봉사의 중심 전각인 보광명전은 석가여래를 주불로 모셨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이고, 용과 여의주로 장식한 닫집이 부처님을 호위하듯 천장에 자리 잡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인 이 전각은 세월의 흔적이 매우 뚜렷하다. 특이하게 법당 안 사방 벽을 벽화로 채웠는데, 아주 오래된 목판 그림이 낡고 삭아서 더 묵직한 감동을 준다. 보광명전의 백의관음보살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벽화다. 불단 뒷벽 전체를 도화지 삼았는데, 그 높이가 3미터에 달한다. 보광명전 벽에는 여섯 점의 주악비천도도 함께 그려져 있다. 보광명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정확하진 않다.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17세기 초에 다시 지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본다. 현판은 1838년 보수 당시 제작되었고,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지은 듯하다.보광명전 바로 옆에는 진묵 대사가 조성한 나한전이 있다. ‘대명당지(大明堂地)’로서 도량의 기가 신성하고 영험하다 하여 나한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이 많이 찾는다. 현재 스님들의 거처로 쓰이는 ‘요사’(유형문화재 제69호, 관음전)는 앞쪽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내고 가운데에 큰방을 두었다. 1806년 보련 대사가 지었으며, 큰방에는 관음보살을 모셨다. 1990년 퇴락 직전에 대대적으로 보수해서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극락전은 1466년 선석·석잠 대사가 논의를 시작해서 60여 년 만에 중수했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994년 완공된 60여 칸의 목조 건물로, ㅁ자형이다. 앞면은 극락전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좌상과 극락정토 만다라(일명 만불탱화)를 모셨다. 뒷면은 주방과 식당, 옆면은 종무소와 소임자 처소로 사용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