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부터 현대사까지 품은 철불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주조 명문 사진(좌) 및 탁본(우)
보림사(寶林寺)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림사의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은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로 만들어진 통일신라 9세기에 만들어진 국보 비로자나불좌상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의 수인은 양쪽 손을 가슴 부분에 모아 왼쪽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이다. 지권인은 지혜의 빛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밝게 해주는 수인으로 “태양이 지닌 특성에 비유하여 온 세계의 모든 것을 두루 비추어 어둠을 없애주고 그 광명은 항상 빛나고 생멸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지닌다. 즉, 80화엄의 주존불로서 화엄신앙과 법신불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지닌 비로자나불은 항마촉지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제작된 불상 중의 하나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273.5cm의 크기가 주는 압도감과 철이 갖는 강렬함이 더해져 근엄하면서도 장중한 아름다움에 보는 순간 누구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마치, 중생을 내려다보듯 아래를 향한 얼굴은 콧등의 면이 편평하게 깎여 있고 인중에는 선을 넣어 강한 느낌을 자아낸다. 입술 아래와 턱의 하단, 입술 옆으로 음각선을 넣어 주름을 표현하였으며, 턱에는 세로 방향의 주름을 새기고, 볼과 턱 부위를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양감이 강조되어 조각적인 입체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특징은 8세기로 대변되는 세련되고 이상적인 모습의 석굴암 불상과는 전혀 다른 조형성이다. 오히려 한국적인 친숙한 얼굴에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과 주름은 복잡하고 거칠어 실재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불상에 보이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은 통일신라 9세기 불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상의 표면에 분할선이 보인다. 불상의 재료가 금동인지 철인지는 정면과 측면에 보이는 분할선의 유무에 따라 분별이 가능하다. 철불의 경우, 상 외부에 드러나 있는 주조 분할선을 통해 몇 개의 틀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으며, 이를 조립 후 빈 공간에 쇳물을 붓는데 그 연결부에 쇳물이 침투하면서 표면에 생기는 요철을 분할선(Parting Line)이라 부른다. 주조 후 재질이 단단한 철의 특성상 분할선을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그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를 감추기 위해 표면에 호분을 바르거나 개금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을 분할주조법이라 하는데 진흙과 모래를 이용하여 만든 주형을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금동불과 달리 표면에 분할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나발 아래쪽에 자리한 이마선 아래부터 얼굴 면을 분할하고, 노출된 가슴 부위를 피해 분할선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불상 예불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위치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상황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양쪽 귀 하단부를 수리한 흔적이 보이며, 오른팔의 균열과 등에도 큰 구멍이 나 있는 상태가 확인되어 현재 보존처리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이외에도, 현재 보림사 상의 나발은 철로 주조하여 복원하였지만, 원래는 흙으로 만들어 붙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소발 형태로 상을 주조한 다음 나발을 부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적광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나무로 만든 대좌도 이때 불에 탔다고 전한다. 이후 건물을 복원하면서 시멘트로 대좌를 만들어 그 위에 상을 봉안하였다. 원래 광배도 있었지만,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다. 또한, 표면에 호분을 바르거나 금으로 개금하거나 또는 1998년 시행한 도색 등의 변화과정을 거쳐 2007년 현재와 같은 원재료인 철 그대로의 모습으로 봉안되어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가까이서 보면 왼쪽 팔뚝에 양각된 명문을 볼 수 있다. 정왕 즉위 3년인 859년에 제작되었으며, 대중 12년 김수종의 청으로 왕이 불상 조성의 칙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정왕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년)으로 의정(誼靖,祐靖)인 휘(諱)를 따 정왕(靖王)이라 불렀다.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情王) 즉위 3년이다. 대중(大中) 12년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주청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몸소 하고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였다.”(“當成佛時釋迦如來入滅後一千八百八年耳時 情王卽位第三年也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七日武州長沙副官金遂宗聞奏情王▨八月廿二日勅下▨이와 같이, 헌안왕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장흥 보림사를 후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명한 선승이었던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 804-880년) 때문이다. 헌안왕은 보조선사를 경주에 초빙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가지산사로 옮기도록 하였는데, 880년 보조선사가 입적한 뒤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게 된다. 가지산사는 현재의 보림사이다. 사찰과 불상 이외에도 보림사와 신라왕실과의 인연은 계속된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2기의 동·서 삼층석탑은 1934년 석탑 보수과정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탑 안에서 함께 발견된 탑지를 통해 헌안왕의 왕생을 비는 무구정탑으로 870년에 김수종이 청해 경문왕이 건립하였다는 경위가 밝혀졌다. 보림사는 물론 봉안된 신라 최대의 철불인 불상 그리고 불탑까지 모두 헌안왕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신라왕실의 지원을 통해 조성되었음이 확인된다. 884년의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 그리고 1457~1464년에 작성된 『보림사사적기(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事蹟記)』에는 보림사의 창건과 내력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쓰여 있다.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땅이라는 내용, 759년 경덕왕이 교지를 내렸고 보조선사 체징이 주석하였으며, 선사가 머무는 사찰(梵宇)을 꾸밀 때 왕이 교지를 내려 금 160푼(分)을 공출하고 조(租) 2,000곡을 내려 가지산문 종찰(宗刹)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보림사는조선후기까지 사세를 유지하다가 20세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쇠락해졌으며,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1950년 늦가을부터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으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1951년 3월 11일 군경에 밀려 보림사를 떠나면서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가 국사봉 아래에서 전멸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때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보림사 중창은 1982년부터 시작되어 대웅전을 중층으로 복원하는 불사가 진행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렇게 보림사는 통일신라 왕실의 지원부터 한국전쟁으로 건물들이 전소되는 가운데서도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철불, 석탑, 탑비를 모두 지켜냈다.
당시 헌안왕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장흥 보림사에 보조선사 체징을 주석하게 하고 사찰 중창 전반에 관여하면서 대형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였다. 여기에는 이름있는 선승을 이용하여 청해진의 해체와 불안했던 무주지역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한 신라왕실의 의지가 작용하였다. 거대한 크기의 철불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며 지혜와 광명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여 왕실의 건재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시작하여 고려 전기까지 대형의 기념비적 철불을 만들었다. 철불은 동아시아에서도 사례가 드문 재료로서 중국에도 몇 점밖에 남아있지 않다. 더불어,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859년이라는 제작연대가 뚜렷하며 조형적 우수성에서 같은 시기의 철불과도 차별되는 특수성을 지닌다. 혼란스러운 통일신라 말기, 종교와 신앙으로 어려운 정치적 혼란을 풀기 위한 왕실의 노력이 더해진 천년고찰 보림사다.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870년, 국보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