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햇살과 바람, 사찰이 일군 변산 내소사 전나무 숲길 산이 바다를 만난 곳, 그 정기로 만물이 소생할지니
내소사 전나무 숲길
나무 중에서 기품 있는 나무를 찾으라면 전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은 자태가 훤칠하여 우아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몸에서 나오는 상쾌한 피톤치드는 자연이 주는 귀한 선물이다. 오래전 어느 새벽, 능가산 정상 관음봉(424미터)에서부터 차츰 어둠을 걷어내면서 산 아래로 내려온 아침 햇살이 전나무 숲길에 부챗살처럼 퍼져가는 순간을 만난 적이 있다. 마치 나를 마중 나왔다는 듯, 그 햇살들이 한결같은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며 속살거리는 것 같았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다 내려놓고 편히 쉬라고…….
내소사 일주문과 할아버지 당산나무 내소사 천 년된 할머니 당산나무 내소사 관음전에서 바라본 전경
오래된, 그러나 세월의 때를 벗겨 정갈한 백제 가람
전나무 숲은 이름표 없는 돌다리, 피안교 앞에서 끝이 난다.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남은 약 150미터 거리에는 운치 있게 허리가 굽은 굵직한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룬다. 오른쪽으로 굽어서 올라가는 길에는 벚나무들이 즐비하다. 내소사를 두고 ‘봄 벚꽃, 가을 단풍’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소사의 전경은 천왕문을 지나야만 비로소 눈에 담긴다. 천왕문에서부터 한 단계씩 차츰 높여가며 지은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맨 윗단에 배치된 대웅보전은 아래쪽을 굽어보게 된다. 천왕문, 천 년 느티나무, 보종각과 범종각, 봉래루, 설선당과 무설당, 삼층석탑 등의 순서로 차츰 산 정상을 향한다. 봉래루 계단을 올라 대웅보전 앞에 서면 용마루 위로 능가산 암봉들이 하늘 아래 우뚝 솟구친다. 능가산 정상 관음봉과 세봉(424미터)이다. 산림청이 능가산을
100대 명산에 선정한 이유가 짐작이 된다. 비록 높지는 않지만 두 봉우리의 부드러운 기개가 변산반도를 감싸 안고도 남을 법하다. 내소사의 백미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과 봉래루의 단청이다. 수백 년 풍상에 오방색이 다 지워진 단청은 나뭇결 무늬와 나무 빛깔만 남아 배롱나무 줄기처럼 말갛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작가는 이를 소지(素地)단청이라고 불렀다. 내소사를 떠올리면 세월의 이끼와 세상의 온갖 때를 다 벗겨낸 것 같은 무단청의 전각이 인상에 깊게 남는다. 내소사 건축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중문격인 누각 봉래루(蓬萊樓)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단청이 탈색되어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서 자연미가 느껴진다. 일정치 않은 모양의 주춧돌 위에 각각 하나씩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그 생김새가 제각각이어서 자유분방하다. 1층의 출입 계단 좌우로 세 줄씩(바깥쪽에서 안쪽으로 4,3,3), 각 열 개씩 기둥을 세워 총 스무 개의 나무 기둥이 봉래루를 떠받치고 있다. 특히 판자벽과 판자문으로 사방을 두른 2층에는 19세기에 만들어진 〈변산내소사영세불망기〉를 비롯해서 〈시액(詩額)〉, 〈근차판상운(謹次板上韻)〉 등의 편액이 여러 점 걸려 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내소사 봉래루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내소사의 다양한 문화유산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대웅보전 목침과 후불 벽화 ‘백의관음보살좌상’에 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으로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타버려 1633년 청민 스님이 중수할 때의 일이다. 대웅보전을 짓는 목수가 3년간 나무를 베고 다듬기만 할 뿐, 건물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미승이 장난삼아 깎아 놓은 나무 토막 한 개를 감췄는데, 목침 한 개가 부족한 걸 알게 된 목수는 주지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 지을 자격이 없다며 건물 짓기를 중단했다. 주지스님의 설득으로 계속 짓긴 했으나, 끝내 나무 토막 한 개가 빠진 채로 완성했다고 한다.또 다른 전설도 대웅보전과 관련이 있다. 대웅전 중창 당시 노스님이 사람들에게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두 달이 지나도록 화공이 밖으로 나오지 않자 궁금해진 사미승이 살짝 문을 열고 들여다봤다. 그런데 화공은 없고 오색 영롱한 새(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새는 결국 단청 한 곳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고 한다. 그 전설처럼 대웅보전 천장 한곳에는 실제 나무 토막 하나가 빠져 구멍만 있고, 오른쪽 벽 한쪽의 단청이 비어 있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대웅보전은 쇠못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목재로만 지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법당 안 후불 벽화인 ‘백의관음보살좌상’은 국내에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크다.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이를 따라서 같이 움직이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전한다. 대웅보전 서쪽 처마에는 여의주가 아닌 목탁을 입에 문 용이 그려져 있어 호기심을 일으킨다.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으나 대웅보전의 여덟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은 아름답기로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무늬를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해서 전설의 목수 솜씨를 상상케 한다. 빗국화꽃살문, 빗모란연꽃살문, 솟을모란연꽃살문, 솟을연꽃살문 등으로 불리는 무채색 꽃살문들이 현실을 초월한 듯 담백하다.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서예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글씨를 썼다.
이 밖에 고려동종, 법화경 절본사본, 영산회괘불탱 등 세 점의 문화재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법화경 절본사본은 1415년(태종 15) 이씨 부인이 남편 유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필사본이다. 필사본이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매우 드문데, 그만큼 필체가 좋고 변상도를 그린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보종각에 보관 중인 고려동종은 고려 때인 1222년 주조된 것으로 본디 변산 청림사의 종인데 폐사되어 땅에 묻혔던 것을 1850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동종 청련암에서 바라본 풍경 지장암
자연과 함께 내소사를 지켜온 고목들
내소사에는 유독 고목이 많고 나무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부부 당산나무는 지금도 매년 내소사와 석포리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줄 만큼 귀하게 대접받는 나무다. 내소사의 얼굴인 전나무를 비롯해서, 희귀한 춘추벚나무, 봉래루 옆의 기품 있는 산수유나무, 천왕문 앞의 단풍나무, 부도밭의 배롱나무 등이 경내에 서식하고 있다. 내소사에서 처음 본 춘추벚나무는 봄과 가을, 한 해에 두 번씩 꽃을 피우는데, 대신 봄과 가을에 반반씩 꽃망울을 터트린다.한편, 내소사에 딸린 암자는 청련암(靑蓮庵)과 지장암(地藏庵)이 있다. 청련암은 내소사 뒤편산 정상으로 1킬로미터쯤 올라간 곳, 해발 350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 푸른 대숲과 함께 남쪽으로 툭 터진 곰소만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최고로 좋다. 이곳에서 저녁에 울리는 종소리를 ‘청연모종(暮鍾)’이라 하여 일찍이 나그네의 심금을 울리는 변산의 절경으로 여겼다. 백제 성왕 31년 (553) 초의 선사(1786~1866)가 창건했는데, 한때 송
진우, 김성수, 여운영 등의 독립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은거지로 삼았다. 일주문에서 전나무 숲길을 따라오다가 오른쪽으로 걷고 싶은 샛길이 보이면 그곳이 지장암 초입이다. 통일신라 초기 진표 율사가 이곳에 은적암을 짓고 수행했다. 3년간 이곳에서 기도한 진표 율사가 지장보살의 현신수기를 받은 곳이라고 한다. 해안 스님(1901~1974)이 복원해서 지장암이라고 개명했다. 1950년 해안 스님이 서래선림을 개설하자 스님 법문을 듣고자 전국에서 모여든 불자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부도밭은 내려오는 길의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내소사를 중창한 해안 대종사를 비롯해서 우암당 혜산 선사(1933~2005), 중흥조 만허 선사, 능파당 명철 선사 등 열 분 스님의 부도와 네 기의 탑비가 단정하게 관리된 부도밭에 고즈넉하게 서 있다.절에서 내려가는 길, 피안교 건너기 직전 오른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여자주인공 대장금과 그의 연인 민정호가 만나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노희순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