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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정은우의 우리 곁에 오신 부처님

논산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

  • 입력 2023.11.01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

 

936년 9월 고려는 일리천(一利天, 경북 선산)전투에서 후백제 신검(神劍)의 군대를 격파하여 완승을 거둔 후, 

논산 쪽으로 패주하는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벌에서 항복을 받아내고 통일을 이룬다. 태조 왕건은 이를 기념하여 진영(陣營)이 있던 곳에 가람을 열어 천호산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부처와 하늘이 보호하는 천호산에 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의미이다. 개태사는 936년에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당시 태조 왕건은 직접 <개태사화엄법회소> 원문을 쓰고 모든 신들에게 감사드리는 글을 지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원문이 실려 있다. 부처와 신령이 도와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에 감사하고 화엄의 이름난 승려를 청하여 화엄경을 강의하고 불경을 설법하였다는 내용이다. 왕건은 고려의 개국과 개태사 창건에 불교만이 아니라 산신신앙까지 흡수하였으며 화엄종 사찰로 삼았다. 

 이후 개태사는 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시는 진전사원으로 승격된다. 고려 초기 태조의 원당은 태조 진영을 모신 개성 봉은사(奉恩寺)와 함께 연산 개태사, 평안도 봉건사(鳳健寺), 죽산 봉업사(奉業寺), 문경 양산사(陽山寺)등이었다. 개태사 진전의 원 자리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현재는 사찰 경내에 진전을 마련하고 왕건릉 근처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개성박물관 소장의 청동왕건상의 재현품과 새로 만든 진영을 모시고 있다. 

고려초기 개태사의 위상은 고려왕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나라에 이상 징조가 있을 때나 어려울 때 개태사의 태조 진전에서 그 답을 구하고자 한 사실이 『고려사』에 전한다. 예를 들어, 1361년(공민왕10) 강화도 천도 시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 관련된 점을 치게 하였다. 1391년(공양왕3)에는 천재(天災)가 자주 일어나고 가뭄이 심하여 좌대언 이첨(李詹)을 연산 개태사에 보내어 태조 진전에 제사하고 옷 1벌, 옥대 1개를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불력(佛力)의 힘으로 나라를 세운 태조 왕건의 이념은 고려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왕건은 수도 개경에 지은 10개의 사찰을 비롯하여, 이에 버금가는 대찰 개태사를 후백제를 항복시킨 그 땅에 창건하였다. 왕건이 개태사 창건에 들인 공덕은 고려왕조 내내 이어졌으며 이를 증명하듯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주요 작품은 개태사에 남아있거나 혹은 개태사에서 옮겨온 대형금동탑, 청동반자, 대형가마솥 등이다. 국보로 지정된 고려초기의 높이 155cm의 대형금동탑(삼성미술관리움)은 1960년대초 땅 속에서 도굴꾼에 의해 출토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고려시대 반자 중 가장 큰 직경 102cm의 개태사 반자는 개태사지 주변의 주택개량사업을 실시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개태사에 남아 있는 직경 289cm, 둘레 910cm의 오백여 명이 먹을 수 대형 대형가마솥(철확,鐵鑊)은 당시 사찰의 사세를 대변한다. 이 가마솥에 대해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은 죽은 후 염라대왕이 그 유명한 개태사 가마솥을 아는지 질문을 한다고 믿고 있다. 개태사는 고려후기 왜구의 침략으로 수차례 약탈을 당하는 등 역사적 사건에 휘말렸다. 즉, 1376년에 왜구가 부여와 공주에 침입하였고 연산의 개태사까지 노략질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진전 사찰이 능욕을 당한 것은 곧 고려의 시조가 피해를 입은 것과 찬가지여서 최영이 토벌을 자청하여 부여 홍산에서 크게 격퇴하였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머리와 허리가 잘리고 머리가 밑에 떨어져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 왜구들이 칼로 불상의 허리를 잘라 훼손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개태사는 오랫동안 폐사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잘린 부분을 다시 원형 복원을 해 놓은 상태로 이어오면서 1930년경 석조여래삼존입상을 중심으로 개태사를 재창건하였다. 이와 같이 개태사는 고려의 개국, 태조 왕건의 희망, 지방사찰의 위업 등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이에 오랫동안 발굴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석조여래삼존입상을 중심으로 창건 당시의 기단부가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 그대로 이어져왔음도 확인되었다.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본존불 높이 415cm, 좌협시보살입상 350cm, 우협시보살입상 320cm의 대형삼존불이다. 넓은 어깨에 밑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져 불균형인듯 하지만 마치 의도한 듯이 발을 크고 투박하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준다. 나발은 일부만 있다. 크고 둥근 얼굴에 눈은 옆으로 길며 뺨 부분의 폭이 넓고 코의 길이는 짧은 편인데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턱에는 세로의 홈이 파여져 있다. 귀는 무척 길고, 불신은 양감이 없이 편평하며 마치 기둥처럼 처리하여 돌의 질량감을 그대로 살려 조각하였다. 신체에는 편단우견식 대의를 입었으며 가슴 밑으로 사선의 균일한 간격의 옷주름을 새겼다.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참고해 보면 일부는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찰임을 고려하여 노사나불로 해석하기도 한다. 두 협시보살입상은 본존상과 비슷하게 둔중하지만, 양팔로 흘러내리는 천의를 수직으로 흘러내리게 처리하여 투박하지만 균형잡힌 모습을 보인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짧은 코와 인중, 미소 띤 입, 넓은 뺨, 턱 부분의 세로 홈이 특징이다. 그러나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팔찌, 치마(裙衣)에 새겨진 꽃무늬 등에서 섬세함이 나타나며, 얼굴은 본존상에 비해 천진하고 부드럽다. 두 손은 들어서 손가락을 살짝 구부린 시무외·여원인의 통인을 결하고 있는데 후보된 부분도 있지만 동글동글하게 조각된 손들이 투박하면서도 사랑스럽다.그런데, 이 삼존상은 특이하게도 두 협시보살상의 얼굴이 다르다. 이는 왼쪽 협시보살상의 머리가 발굴 과정에서 발견하여 복원해 놓았기 때문이다. 새로 발견된 보살상의 머리부분은 흙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기 때문인지 상태가 좋으며 얼굴의 표현에서도 생명력 넘치는 표정에 미소가 있어 매우 귀여운 모습이다. 삼존상의 대좌는 여래입상은 방형, 협시보살상은 팔각이다. 삼존 모두 뒷면에 큰 구멍이 있는데 본존불인 여래입상은 2개, 보살상은 1개로, 광배나 혹은 지지대를 끼우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 광배는 불상 전체를 감싸는 거신광으로 추정되는데, 재료가 돌이라면 그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사진이나 발굴에서도 석조광배편은 발견되지 않아 돌이 아닌 다른 재료를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목이 두껍고 신체의 굴곡도 거의 없는 점 등 통일신라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은 고려초의 새로운 조형성이 반영된 작품으로 이해된다. 특히, 둔탁한 신체 표현,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질량감, 무겁고 투박한 두 발, 듬성듬성 새긴 나발은 비교되는 사례가 없다. 여래상이 입은 편단우견식 대의는 앞 부분이 깊게 파여져 있으며, 보살상 역시 꽃모양이 새겨져 있거나 허리에서 내려오다가 그 탄성으로 튕겨 올라가는 두 줄의 매듭띠는 실제인 듯 탄력감이 느껴진다. 태조 왕건은 통일의 위업이 부처의 힘으로 이루어졌음을 천명한 호불왕이었다. 이에 수도 개경은 물론 지방에 수도 개경에 버금가는 대찰 개태사를 후백제를 항복시킨 그 땅, 그 곳에 건립하였다. 왕건은 개태사 창건과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을 고려 건국의 기념비적인 의미와 상징물로 삼은 것이다. 고려를 건국하게 된 마지막 전투의 그 땅에 대형불상을 만들어 기념한 사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또한 석조여래삼존입상의 특징과 조형성에도 변화를 주는 등 창의력을 더하였다. 투박하고 둔중한 미의식과 거친 야성적 조형성은 이전 통일신라시대의 부드러운 세련미와는 다른 차별화된 특징으로 건국초의 왕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광종대에 조성되는 18m가 넘는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나, 10m의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으로 계승 발전되면서 또 다른 걸작을 남기게 된다. 

 

                                             복원 전과 복원 후, 일제강점기(유리건판)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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