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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나를 성숙시키는 사람
아주 오랜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 어느 시절엔가 보리살타일 때에 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마노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식이 있었습니다.아들 마노자는 식구들의 먹이를 홀로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정글로 들어가서 물소와 같은 동물을 잡아서 가족이 살고 있는 사자굴로 가지고 갔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사자인 마노자는 자칼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자칼은 사자가 다가오는 데도 도망치지 않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마노자가 다가가자 자칼이 겁에 질린 듯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말했지요.“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앞으로 당신을 제 주인으로 모시고 받들고 싶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사자 마노자는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그래? 좋아. 앞으로 나를 잘 모시도록 하라.”아들 사자 마노자가 자칼을 데리고 사자굴로 들어가자 보리살타인 아버지 사자가 슬그머니 따로 불러서 일렀습니다. “얘야, 마노자야. 자칼이란 동물은 예의범절을 갖추지 못했고 무법자이며 다른 이에게 그릇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무법자다. 저런 녀석을 곁에 두면 안 된다.”아버지는 진심으로 이렇게 일렀지만 아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하러 나갈 때면 언제나 자칼을 거느리고 다녔지요. 어느 날, 자칼은 말고기가 먹고 싶어서 주인으로 모시던 마노자에게 말했습니다.“주인님. 지금까지 온갖 고기는 다 먹어봤는데 말고기는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말을 사냥하면 어떨까요?”“좋다. 벗이여, 그러면 말은 어디에 있지?”“바라나시 강 언덕에 있습니다.”마노자는 자칼의 말을 듣고 함께 강가로 갔습니다. 마침 말이 강에서 목욕하고 있을 때여서 사자는 살며시 다가가서 한 마리를 급습했지요. 그리고 등에 싣고 서둘러 사자동굴 입구로 돌아왔습니다.아들이 잡아온 말고기를 먹으면서 그 아버지는 그래도 영 조심스러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아들아. 말은 왕의 재산이다. 왕이란 존재는 수많은 계략을 세우고 있으며 솜씨가 빼어난 명사수를 곁에 두고서 맘에 들지 않으면 화살을 쏘아 잡는 사람이지. 말고기를 먹는 사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말을 잡아오지 말라.”하지만 아들사자는 아버지 충고를 흘려듣고서 계속 말을 잡았습니다. “사자가 말을 잡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왕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왕은 서둘러 성 안에 말들의 목욕장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사자는 그곳까지 다가가서 말을 잡아갔지요. 왕은 말 우리를 만들어서 그 안에 말이 먹을 꼴과 물을 마련하고 말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말 우리 안까지 들어와 말을 잡아갔습니다.결국 왕은 즉각 명사수를 불렀습니다.“내 말을 잡아가는 사자를 죽여라!”명사수가 자기가 다니는 길에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한 사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칼을 데리고 말 우리로 다가왔습니다. 묘지 밖에서 자칼을 기다리게 하고 사자는 말을 잡으러 성으로 달렸습니다. 명사수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사자가 말 한 마리를 잡아서 돌아갈 때 무게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자 날카로운 화살을 뒤에서 쏘았지요. 화살은 사자 몸을 꿰뚫고 앞으로 날아갔고 사자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자를 맞춘 명사수는 천둥처럼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습니다. 한편 묘지에서 사자를 기다리던 자칼은 사자의 절규와 활시위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습니다.“내 친구가 화살에 맞아 죽었구나. 죽은 자와는 더 이상 그 어떤 신뢰관계도 맺을 필요가 없지. 이제 나는 내가 살던 숲으로 가버리자.”
한편 화살을 맞은 사자는 간신히 동굴로 돌아와서 말을 입구에 떨어뜨린 뒤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피범벅이 된 채 숨이 끊어진 아들을 보고 비탄에 잠겼고, 아버지 사자인 보리살타는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하잘 것 없는 자를 친구로 삼으면그 사람은 틀림없이 멸망하고 만다. 엇비슷한 자를 친구로 삼으면
그 사람은 결코 쇠멸하지 않는다.존귀한 자를 가까이 하여 친애하면그 사람은 그 즉시 인생이 향상된다.
그런 까닭에 자기보다 뛰어난 자와 우정을 맺어라. 세존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과거 전생을 현재에
잇대어 말씀하셨습니다.“그때 자칼은 데바닷타였다. 마노자는 자기를 해친 적과 우정을 맺은 지금의 저 비구이며, 누이는 우팔라반나 비구니였다.
아내는 케마 비구니, 어머니는 라훌라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는 실로 나였다.”(본생경 397번째 이야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에세이는 한때 사람들이 참 즐겨 인용한 에세이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
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
친구란 어떤 사이인가를 이렇게 다정한 글로 정갈하게 정리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 글을 읽을 때면 늘 마음에 두 가지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내게 그런 친구가 있을까.
둘째는, 나는 과연 누구에게 이런 친구일까.내 흉허물을 그대로 내보여도 괜찮고 다른 이의 뒷담화를 쏟아내도 바위보다 더 무거운 침묵으로 소문내지 않는 친구라면 인간미는 따져보지 않아도 완벽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인간관계를 접고서 구도자의 길로 인생행로를 바꾼 수행자에게 친구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요? 부처님은 구도자로 살아갈 때에도 친구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가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은 청정한 수행을 반쯤은 이룬 것이겠지요?”하고 여쭙자 부처님은 아니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은 청정한 수행 전부를 이룬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쌍윳따 니까야』)
친구가 이토록 한 사람 인생에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성현들도 인정한 바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좋은 친구’라는 점입니다. 아무나 친하게 지내거나, 그저 스스럼없이 대해도 흉허물이 나지 않는 정도가 아닌 것이지요.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요? 앞서 사자 마노자 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의 인생이 그 즉시 향상되도록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향상(向上)이란 말은 업그레이드한다는 뜻입니다. 내 인생이 좀 더 품위 있고 가치 있고 소중해지도록 인도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좋은 친구입니다. 물론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옛 속담을 떠올리면서 부자 되게 하고 유명해지게 하고 식도락을 함께 하는 등의 세속적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 새삼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좋은 친구를 사귀면 수행의 전부를 다 이룬 것과 같다고까지 한 붓다는 다른 경전에서는 이렇게 상세하게 말합니다.바르게 살고 마음공부를 탄탄히 하여서 인생을 온전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선한 벗을 사귀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사람을 잘 가려서 가까이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도 양심을 지니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선한 벗을 사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귀중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귀중한 대화란, 욕심을 버리는 일과 관련한 대화, 지금 지니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대화, 자꾸 피곤하게 만들고 충동질을 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게 하는 대화, 번잡한 일들과 인간관계를 멈추게 하는 대화, 부지런히 노력하게 하는 대화, 양심에 부끄럽지 않는 것에 대한 대화, 산란한 마음상태에서 오롯하게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 대화, 내가 알아야 할 이치들을 밝게 꿰뚫을 수 있도록 하는 대화 등입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면 나는 더 노력하고 싶어지고, 내게 벌어지는 일들에 직면해서는 그 일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끝이 나는지 지혜롭게 관찰하는 힘이 생깁니다.(『앙굿따라 니까야』 제9권)
소중한 아들이 친구 하나를 잘못 사귀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그 아버지는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애초 아버지는 조심하라고 일렀지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충성하겠다며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자의 접근을 쉽게 허용한 아들이 못내 위태로워 보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사자는 이런 우정을 가리켜서 ‘자기보다 못한 자, 하찰 것 없는 자’를 친구로 삼는 바람에 끝내 인생을 망치는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나와 모든 면에서 비슷하여 차이가 나지 않는 자를 친구로 삼는 것은, 파멸로 가지는 않지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관계입니다. 평생 그냥저냥 살던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이지요.우리가 사귀어야 할 사람은 내가 좀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의 손이 작고 어리어도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는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에 어울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세파를 헤쳐 나가며 단단해지고 조금 더 나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기둥이 되어주고 불빛이 되어주는 존재-나를 향상시키고 너를 향상시키는 사이, 붓다가 일러주는 우정론입니다.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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