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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스님의 새로운 신행이야기
<조계사 극락전 시왕도 중 오도전륜대왕>지옥을 다스리는 마지막 왕으로 오도전륜대왕의 최후 심판으로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질문) 윤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삼세윤회설 같은 주장도 있고, 어떤 분들은 윤회보다 현세의
행동에 대한 과보만 믿어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궁금합니다.
윤회에 대한 설명은 <업과 인과>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하면 좋습니다. 불자님께서 질문하신 현세의 행동에 대한 과보(果報)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윤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쨌든 지면 관계로 이번에는 윤회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업과 인과, 윤회의 관계를 설명했으면 합니다.
윤회(輪廻)는 우리들의 삶이 단지 부모님, 어머니에게서 나올 때 생겼고,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나고 죽는 인간의 삶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둥그런 시계나 바퀴처럼 끊임없이 굴러가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질문하신 것처럼 교리(敎理)적으로는 삼세(三世) 윤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삶에는 전생(前生)이 있고 금생(今生)이 있으며 내생(來生)이 있어서 전생의 영향으로 금생이, 금생의 삶이 내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삼세인과경(三世因果經)> 같은 경전에서는 ‘전생의 일을 알고 싶거든, 금생에 내가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생의 과보를 알고 싶거든, 금생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고 죽는 문제에 대한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인간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한 철학과 사상도 이 문제에 대한 저마다
의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내세에 대한 기대로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하고, 혹은 철저한 부정으로 감각적인 삶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불교가 발생했던 인도에서는 이런 생사(生死)의 참 모습을 윤회로 이해한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단지 나고 죽는 문제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처님 일대기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땅 위의 벌레를 작은 새가 먹고 그 작은 새를 더 큰 새가 잡아 먹고 그 새들은 죽어서 다시 땅으로 흩어지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해서 다시 벌레들이 커나가는 이치를 인도인들은 윤회라고 설명했고 불교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윤회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갑니다. 불교적인 윤회관으로 보면 내세만을 인정하는 종교들은 불합리하다고 봅니다. 보통의 종교들은 현세의 행위가 우리의 내세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왜 이런 모습으로 존재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고, 신의 영역이라든가 운명으로 돌려 버리지요. 인도인들과 불교는 그것을 전생의 개념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고 알 수 있는 것에는, 유난히 집착합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태양이 생겼다고 하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태양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별로 오래전도 아닌 17세기, 18세기에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었지요. 태양은 떠오르기 이전에도 있었고, 지고 난 뒤에도 존재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없어졌다고 해서 생성과 소멸을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루의 삶을 가진 생명체들이 낮과 밤을 알 리 없고, 한 달의 수명을 가진 생명들이 봄과 여름, 가을 겨울
의 변화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길지 않은 삶을 사는 인간들 역시 전생과 내생의 일을 알기는 힘들지요. 내일이 있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듯이 미래의 삶이 계속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열심히 살고 올바르게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수많은 보살의 삶으로 선행(善行)을 하신 것은, 바로 내일의 삶을 위한 오늘의 선행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남전스님 (포교원 포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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