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이 오래 살기를 희망하며
순천 송광사 관음전에는 1662년에 만든 크기 92cm 목조관음보살좌상 한 구가 전각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관음전 내부 벽에는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특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보살상에 가려져 일부만 보이지만 뒷벽에는 태양과 달이 그려져 있고, 전각의 양 측면으로 많은 대신들이 마치 조선의 왕을 대하듯 허리를 굽혀 조아리고 있는 품계도(品階圖)가 있다. 이 그림들은 무엇인가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임을 암시한다. 태양과 달은 조선의 왕들이 머무는 궁궐내 집무실 뒤편에 놓이는 일월오봉병에서 볼 수 있는 그림으로, 직접 묘사가 금지된 왕을 대신한다. 그래서, 송광사 관음전은 일반 사찰과는 격이 다른 위엄과 정중함을 갖춘 전각이다. 그 이유는 관음상이 안치된 전각이 1902년 고종황제의 원당인 성수전(聖壽殿)으로 건립되었는데, 1957년 관음전으로 명칭을 바꾼 건물이기 때문이다. 성수전이란 성수(聖壽. 51세)를 맞은 고종황제를 위한 기도처로서 왕이 직접 편액과 재물을 내렸다. 성수전이 관음전으로 바뀐 것은, 성수전 앞에 있었던 관음전이 무너질 지경이 되어 보살상을 성수전으로 옮기면서 전각의 이름도 바꾼 것이다. 이렇게 관음전은 20세기 조선왕실과 인연이 닿아있다. 그런데, 그 안에 봉안된 관음보살좌상 역시 그 이전 조선왕실과의 역사를 품고 있어 왕실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 흥미롭다. 이 관음보살상은 현재 전각 내의 불감 안에 모셔져 있으며 당당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을 보이지만, 이 안에는 조선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음이 내부 복장물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즉, 2009년 개금 불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11건 35점의 복장물이 당시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 중요한 복장물은 조성 발원문과 안쪽에 묵서가 쓰여 있는 저고리, 저고리 위에 입는 소매없는 조끼인 배자(褙子)를 비롯한 직물류, 그리고 1462년 간경도감에서 판각된 경전들이다. 저고리는 남자용, 배자는 여성용이다. 특히, 복장 발원문과 저고리 안감에는 먹으로 강희원년 임인(康熙元年 壬寅,1662, 현종 3년)나인 노예성(盧禮成)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과 부인 허씨 내외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壽命長遠) 마음을 담은 발원 내용이 적혀 있다. 아마도 경안군이 오래 살기를 희망한 부인 허씨가 발원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경안군은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 잘 알려진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이석견(이회)이다. 경안군의 아버지이자 왕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재능을 겸비하였으면서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으로 소설과 드라마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 인조에 의해 죽게 되는 비운의 아이콘으로 잘 알려진 왕세자이기 때문이다. 볼모로 청에 들어가 1644년 11월 중국에서 석방되고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 지 두 달만인 1645년 4월 26일 독살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4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현세자가 죽은 1년 뒤 아내인 민빈 강씨도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역모죄로 사약을 받고, 그녀의 친족들도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고 장남 경선군(慶善君) 이석철과 차남 경완군(慶完君) 이석린은 1년도 안되어 섬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인조는 손자들의 나인들까지 문초하고 매를 쳐 죽이는 장살을 잔인하게 행하였다. 왜냐하면, 장자 우선인 조선 사회에서 적손인 소현세자의 아들 경선군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한다는 조정의 의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조가 바랬던 차남 봉림대군(1619-1659, 재위 1649-1659)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결국 인조의 뜻대로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하였지만 10년만인 40세에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그의 아들 현종 역시 30대 초반에 요절한다. 아이러니한 역사의 순환인가?
송광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 좌상(1662)
송광사 관음전
관음전 내부 벽화
피비린내 진동한 그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바로 이 보살상과 관련된 막내 경안군이다. 경안군은 4살에 제주도로 귀양가서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왜냐하면, 효종은 인조와 달리 소현세자의 집안에 온정적인 처분
을 내렸고 점차 유배를 풀어주었다. 소현세자의 4살짜리 막내아들이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 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은 것이다. 경안군은 결혼 후 6년 뒤인 23세에 요절한다. 경안군의 분성군부인(盆城郡夫人) 허씨는 유배생활 동안의 내용을 <건거지(巾車志)>라는 한글로 남겼다. 경안군은 유일한 소현세자의 직계로서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임창군(臨昌君)과 임성군(臨城君) 두 아들을 두었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 전주이씨 소현세자파로 남아있다.
이 목조관음보살상에는 이렇게 소현세자 가족의 비애가 담겨 있다. 저고리 안쪽에 쓴 발원문에 경안군과 그 부인 허씨가 오로지 오래 살기만을 바라는 ‘허씨이씨경안군양위수명장원(許氏李氏慶安君兩位壽命長遠)’의 문장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이 글씨는 먹이 번져 더 처연하며, 저고리 안쪽에 찍은 붉은색 다라니는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더 간절하게 다가오는 듯 절실하다. 그러나, 관음전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상은 슬픔보다는 당당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상이다. 앞으로 숙인 자세에 결가부좌하였으며, 넓은 무릎과 당당한 자세, 화려하고 큰 보관과 위엄있는 얼굴, 장식적인 세부 표현이 특징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양 어깨에 두른 천의는 끝자락이 팔을 감은 다음 발목을 거쳐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모습이다. 그 안으로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규칙적으로 주름을 잡은 군의, 그리고 양 무릎에는 갑대를 끼워 장식하였다. 머리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문과 화문, 구름문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대가 수평으로 휘날리는 듯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마치 모든 나쁜 기운을 몰아 내듯 역동적이며 세련된 장중함을 담고 있다.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 일괄, 1662년
저고리와 안감에 적힌 묵서발원문
이와 같이,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그 사례가 적은 조선후기 왕실 발원 상으로 이 보살상을 만든 조각승은 혜희(慧熙)와 금문(金文)이다. 혜희는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17세기 최고의 조각승들 가운데 한 명으로, 역동적이고 화려한 천의와 영락, 보관 표현 등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보살상을 창안하였다. 송광사 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은 법주사 원통전에 있는 1655년의 2m가 넘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대표작으로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막내아들 경안군이 21살로 죽음을 맞이하는 1665년을 고려하면 송광사 목조보살좌상을 만든 1662년은 경안군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1656년 12살이 되는 해 유배에서 풀려나 복위되고 혼인으로 행복한 미래와 삶을 꿈꾸었던 시기였다. 그러한 마음이 보살상의 모습에도 반영되었나 보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자비롭지만 당당하고 강인한 모습이다. 현재, 경안군과 허씨부인은 62세까지 산 아들 임창군 부부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나란히 묻혀 있다. 아들 임창군이 쓴 묘비가 있고 양지바른 곳
에 편하게 있으니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공덕이 미쳤음일까? 조선역사 가운데 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세자는 대부분 사도세자와 더불어 소현세자를 꼽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파였던 소현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했다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하곤 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적통 부재는 물론 그로 인한 왕권의 실추도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그의 막내아들 경안군의 인생도 행복하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역사적 상상력은 경계가 없는 것이니 자유로운 추론으로 경안군과 그 가족들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