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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에는 ‘소리의 만다라’를 들으러 가자
水出靈源洞裏深 老龍有宅鶴巢林
수출영원동이심 노용유택학소림
峻峯立北天無後 積雨彌東海洩襟
준봉입북천무후 적우미동해설금
望際分明人鍊道 風便寂莫夜 砧
망제분명인연도 풍편적막야용침
滿庭皓月寒鍾信 多少秋 露草吟
만정호월한종신 다소추충노초음
월하계오(月荷戒悟, 1773~1849), 「보경사(寶鏡寺)」
9월이면 포항 내연산 보경사에 가볼 일이다. 여름 폭풍우가 지나자 산에는 맑고 맑은 물만 남아 있음에도, 열두 개의 폭포가 많고많은 물을 또다시 정수(淨水)하고 또 정수하여 맑고 맑은 비원(悲願)만 남은 곳, 그곳에서 늙은 용과 학과 신선과 사람과 크거나 작은 짐승들과 온갖 벌레들과 바다와 하늘과 산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를 감상해볼 일이다. 내연산 바위들은 말이 많다. 거품을 물면서 그들은 말한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데도 조금도 시끄럽지 않으니, 우리는 그 말을 신령한 근원에서 솟아오른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에서는 꼬리가 보이지 않는 용이 산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고, 용의 친구인 학에게 용의 소식을 물으면, 대답은 폭포가 대신한다. 초가을이면, 맑고 맑은 정수(淨水)만 남은 포항 내연산에서 우리는 바위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때 우리의 수행도 비로소 끝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북쪽 하늘은 아예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할 수 없음을 동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말해준다. 선사는 동해 바다를 ‘쌓인 빗물’이라고 말한다. 그 빗물에 목욕하기 위해 바다가 옷깃을 푼다니, 내연산 보경사에서 우리는 비로소 바다가 목욕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 보경사에서 바다로 난 길을 따라 끝없이 가서 옷을 벗으면, 마침내 바다와 함께 목욕할 수 있겠다.김현승 시인이 “봄은 입술로 말하더니/ 가을은 눈으로 말을 한다”(「가을의 비명」)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가을은 귀로 듣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가을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면 ‘가을의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그리고 멀리서 달이 은하수를 건너는 소리!안도현 시인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는지요”(「구월이 오면」)라고 노래했는데, 나는 9월이 오면 보경사에 가서 가을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들으라고 권선한다. 불보살님들을 빽빽하게 그려넣어 불국토를 형상화한 그림 만다라가 나중에는 추상화된 도형으로 바뀌듯이, 내연산 보경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소리들은 눈을 감고 들으면 추상화된 소리의 만다라가 된다. 옛 선승의 시절에는 “바람이 전하는 소식 적막해도 한밤엔 다듬잇돌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산사에서도 베를 직접 짜서 옷을 해입었을 테니, 다듬잇돌 소리도 심심치 않게 있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한밤중, 뜰 가득 환한 달빛이 내리자 종루의 차가운 범종이 달빛을 받으니, 범종은 두들기지 않아도 한없이 맑고 고요한 소리를 내나! 들리지도 않는 범종 소리를 갖가지 가을벌레들이 이슬을 묻혀서 퍼뜨리니 여기저기 풀잎에서 이슬 한방울씩 뚝뚝 떨어진다. 이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소리의 만다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9월이야말로 기다림의 계절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봄이나 모내기 후 김매기에 열중하는 여름에 비해, 하루하루 곡식이 익어가는 것이 보이고, 과일이 여물어가는 것이 보이는 초가을이면, 더욱 손꼽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나태주 시인은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다시 9월」)라고 충고한다. 기다리자! 아니 기다리지 말자! 기다리지 않아도 세월은 가고, 과일은 익어가고 곡식은 여문다. 가을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고, 과일은 각양각색으로 익고, 단풍이 붉게 물들어서, 가을은 눈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가을의 초입에 가만히 눈을 감고 가을을 느껴보자.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가을은 눈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귀로 느끼는 것임을, 가을벌레가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이슬 맺힌 가을노래가 얼마나 풍성한 소리의 만다라를 이루고 있는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초가을에는 소리의 만다라가 장엄한 포항 내연산 보경사에 가볼 일이다.
동명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잠실 불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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