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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천년숲 사찰기행

보림차 향기 들으며 걷는 차명상길, 보림차약길과 보림백모길

  • 입력 2023.08.01

가지산파의 중심,

구산선문의 첫 도량 보림사 

 

야속한 일기예보는 계속 우산 그림 일색인데, 왠지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날씨 때문에 허탕 친 적은 없으니, 이번에도 잘 보살펴주시겠지 하는 믿음 덕분이었다.다섯 시간가량 빗길을 달려서 도착한 장흥 가지산(迦智山) 자락의 보림(寶林寺). 절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즈음, 우리 기도를 들으셨는지 하늘이 조금 맑아졌다. 먹구름이 벗겨지고 연꽃잎 모양으로 보림사를 둘러싼 가지산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비가 다시 쏟아지기 전에 바깥 촬영을 마치기 위해 서둘러 부도밭으로 향했다. 보물로 지정된 보림사 동부도탑과 서부도탑은 일주문 밖에 있었다. 특히 서부도탑(봉덕리 산 50) 두 기는 보림사 서쪽 마을 산기슭, 일주문에서 꽤 먼 거리에 위 탑과 아래 탑이 떨어진 채 서 있었다.  동부도탑(봉덕리 산 10-1) 역시 일주문 바깥, 동쪽 부도밭(총 8기)의 맨 윗단에서 오가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림사 터가 얼마나 넓었을지 헤아려볼 뿐이다. 가지산의 ‘가지(迦智)’는 ‘석가모니의 지혜’라는 뜻이다. 보림사(寶林寺)가 구산선문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서 이곳에 자리 잡은 시기는 통일신라 때인 860년경이다.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헌안왕(재위 857~861)의 권유로 지었는데, 구산선문 중 첫 번째로 개산한 뜻깊은 사찰이다. 보조체징 선사는 보조지눌(1158~1210) 국사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사실 가지산에는 보림사보다 백 년 앞선 759년경, 원표(元表, ?~?) 대사가 지은 가지산사가 터를 잡고 있었다. 당나라를 거쳐 인도의 불교 성지를 두루 다녀온 원표 대사가 인도와 중국의 가지산과 산세가 닮은 이곳을 절터로 삼은 것이다. 

조선 세조 때 발간된 《신라국 무주가지산 보림사 사적》에는 보림사에 관해 많은 것들이 적혀 있다. 그 사적기 따르면, 가지산 못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한 선녀의 하소연에 원표 대사가 용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가지산사를 지었다고 한다. 구산선문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중국 달마 선사의 선풍을 지켜온 아홉 선문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가지산파는 도의(道義) 스님을 종조(宗祖)로 삼고, 염거 스님을 2세로, 보조 선사를 3세로 해서 법을 이었는데, 보조 선사 당시 전국의 스님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고 한다. 가지산파 개산을 전후로 아홉 개의 선문이 차례로 문을 열면서 구산선문이 시작되었다. 보림사는 이후 인도 가지산 보림사와 중국 가지산 보림사 등과 합쳐서 ‘삼보림(三寶林)’으로 불렸다. 

 

 

키 큰 비자나무와 무성한 야생 차나무가 어우러진 보림차약길과 보림백모길


키 큰 비자나무와

무성한 야생 차나무가 어우러져 

 

1,200여 년 우리 전통차의 역사에서 장흥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총 19개의 다소(茶所) 가운데 13개가 장흥에 있었다고 한다. 그 장흥의 차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시키며 이끌어온 중심에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 차는, 발효차로 가운데가 뚫려 엽전을 닮은 보림돈차(떡차, 전차 등으로 불림)와 초의(1789~1866) 선사가 만든 보림백모차가 대표적이다. 보림사 주변의 찻잎을 따서 찌고 절구에 찧은 다음, 두께 1센티미터, 지름 3.5~4센티미터로 동그랗게 뭉쳐서 가운데 구멍을 뚫어 꾸러미로 꿰는 것이 보림돈차다. 보관하면서 발효가 되어 4~5년 뒤에 우려내 마실 수 있다.

특히 초의 스님의 보림백모차는 최고급 차로 이름이 높았다. 보림사 뒷산 야생차의 여린 순을 따서 만들었으므로 찻잎 자체가 귀하고, 다제도 쉽지 않아 보림돈차에 비해 값이 무척 비쌌다고 한다. 보림사에는 차에 관한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가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비석에는 “보조체징 선사의 보림사 창건을 앞두고 헌안왕께서 경주로 처음 모시고자 할 때 ‘차약(茶藥)’을 선물로 보냈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보림사 뒷산 비자나무숲에는 300년 넘은 비자나무 500여 그루를 포함해서 800여 그루의 키 큰 비자나무들이 빽빽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위쪽에 비자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차나무가 자라는 ‘난대생태림’의 희귀한 산림 형태라고 한다. 비자나무 자체가 보호수여서 제각각 번호를 매긴 관리번호표를 달고 있다.이 숲은 1982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됐다. 2009년에는 산림청과 (사)생명의숲, 유한킴벌리가 공동 주관하는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천년의숲’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비자나무는 조선시대에 사찰에서 조정에 올린 진상품이었다. 동백기름이나 차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았는데, 그 이유는 비자(비자나무 열매)가 민간에서는 구충제로 요긴하게 쓰이고, 왕실에서는 제사상에 올렸으며, 고관대작들 사이에서는 고급 바둑판 재료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조선 문종 때 탐라국에서 비자를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보림사 차밭은 구역별로 나뉘어 관리받는데, 차나무가 자생하는 산의 넓이만 1만 5천 평에 달한다. 전국 사찰 차밭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짐작된다. 보림사 차 유래에 대해서는 원표 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져왔을 거라는 차인(茶人)도 있다. 그만큼 보림사 차와 차밭의 역사가 오래되고 깊다는 뜻이다.다만 안타까운 건 보림사 발효차 이름 ‘청태전’에 관해서다. 떡차, 전차, 돈차 등으로 오랫동안 불리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상비약으로도 사랑받던 차를 난데없이 ‘청태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청태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두 명이 차례로 장흥 지역에 내려와서 보림사 발효차를 보고 아전인수로 붙인 이름일 뿐, 역사

성도 의미도 없다. 본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차명상이 저절로 되는

보림차약길과 보림백모길

 

키 큰 비자나무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우거진 차나무가 발길을 어지럽히는 보림사 비자나무숲에는 작은 산책길이 두 갈래로 나 있다. 천 년 전통차를 만나는 보림차약길 (550미터)과 보림백모길(620미터)이다. 보림사 경내를 거쳐 뒷산으로 가는 길, 폭신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지다가 보림백모길 안내판이 왼쪽으로 굽은 길을 가리키며 나타난다. 산 위쪽으로 보림차약길이 나 있지만 망설일 필요는 없다. 우리 인생처럼 두 번쯤 나뉜 길이 다시 만나기도 하고 또 갈라지기도 하면서 결국에 다시 만나게 된다. 보림사 오른쪽 뒷길로 올라가 보림차약길을 먼저 돌고 다시 보림백모길을 따라 한 차례 명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40분이면 충분하다.비자림길은 습도가 높고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비자나무와 대나무 등 그늘이 짙다. 비자나무 향과 온도와 습도, 안개 등의 환경이 적당히 조화를 이뤄 차나무 생장에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보림사 차 맛의 비결이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찾아오는 이들에게 보림사에서 만든 차를 한 잔 내어주며 차명상을 권하는 주지 일선 스님은 신도들 중심의 차명상 모임 ‘선차회(禪茶會)’를 이끌면서, 회원들과 함께 봄에는 찻잎을 따서 만들고 평소에는 정기적으

로 명상법회를 연다. 찻잎을 따거나 제다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1,200년 보림사의 차밭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잠깐 지켜보고도 알 것 같다.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 본존은 대적광전의 철조비로자나불이다. 대적광전 앞마당의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보 문화재다. 불상 왼팔 뒤쪽의 명문에 858년(헌강왕 2),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 김수종이 자기 재산을 들여 이 불상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다. 다른 철불에 비해 인상이 부드럽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뤄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남북 삼층석탑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1932년 도둑이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넘어뜨려 이듬해 복원할 때 1층 탑신부 사리 구멍에서 사리와 조성 내용이 적힌 〈탑지〉가 나와, 870년 통일신라 경문왕 10년에 조성되었음을 알았다. 석등도 같은 시대에 세워졌다.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2층 건물이 불에 타서, 1982년 복원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겉은 2층이지만 안은 높게 틔어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상과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1951년 7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보림사 대적광전을 비롯해서 당시 국보였던 대웅보전 등 20여 동의 전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불타지 않은 건 사천문과 사천왕, 그리고 외호문뿐이었다. ‘선종대가람’ 현판이 걸린 외호문은 1726년(영조 2)에 조성되었다. 사천문이라 적힌 사천왕문은 보물이다. 1515년(중종 10) 처음 조성되었고, 사천왕은 목조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80년(정조 4), 유일하게 임진왜란 전에 조성된 것이다. 1995년 사천왕의 무릎과 발 등에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국보급 희귀본(월인석보) 등 고서 250여 권이 나왔다.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보물)                                                                          보조선사창성탑과 탑비


1,2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보물,
보조선사창성탑과 탑비

가지산파 3대조로서 보림사를 창건한 보조 선사의 부도탑과 탑비다. 보림사 경내에서 가장 높고 쾌적한 곳에 있다. 보림사는 부도밭이 세 군데인 셈이다.서기 884년(헌강왕 10) 조성된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880년 보조 선사가 입적했을 때, 제자 800여 명이 보림사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비몸돌에는 보조 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앞부분은 보림사 창건에 관한 내용이고, 뒷부분에는 선사의 창성비문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 통일신라 당시의 조형 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보조선사창성탑에는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헌강왕이 보조 선사라는 시호와 ‘창성’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바닥돌부터 머릿돌까지 팔각형으로 조각된 통일신라 전형적 탑 양식을 갖췄다. 다른 사찰과 달리 보림사는 사하촌이 없다. 속계와 법계의 경계가 사라진 듯 조금 헛헛하다. 문향(聞香), 멀리서 비자나무숲의 은은한 향기가 들려올 듯하여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노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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