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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석조여래좌상 1910년대 경주에서 온 미남석불
오랜 세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던 청와대가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내부 깊숙한 공간까지 볼 수 있는 관람이 가능해졌다. 물론, 예약은 필수다. 청와대에는 경주지역의 우수한 암석인 알카리장석 화강암(Alkali feldspar granite)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 봉안 장소가 청와대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특정한 관계자만 갈 수 있고 볼 수 있어 오랫동안 소문만 무성했으나, 이제는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불상을 만나려면 청와대 정문을 통과한 다음, 춘추관에서 녹지원을 거쳐 상춘재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와대 관저가 있고 그 뒤쪽으로 북악산 자락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친견할 수 있다. 전체 높이 2.22m, 불상 높이 1.08m 정도 되는 크기의 이 불상은 약간의 훼손된 부분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대좌 기단석과 중·하대석 및 광배는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를 포함한 전체 크기는 없어진 부분을 더하면 아마도 3m가 넘을 것이다. 현재, 사방이 트인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지만, 형태나 크기, 단청 등 조형적인 면에서 불상의 역사나 격조를 담아내지는 못해 아쉽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었디. 지정 당시 공식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그런데, 서울이 조선의 수도였음을 감안해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불상이 경복궁에 모셔졌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조선고적도보>(1917년), <매일신보>(1934년, 1935년),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1882-1950) 복명서(復命書)>(1939년) 등의 기록을 통해 불상의 내력과 이동에 대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를 종합하면,
원래 경주에 있던 이 석조여래좌상은 당시 경주 금융조합 이사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가 자신이 소장하기 위해 원 장소에서 옮겨왔으며, 1912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경주 순시 중 이 석불을 보고 마음에 들어해 이듬해 1913년 서울 남산에 있었던 왜성대 총독부 관저로 다시 옮겼다고 한다. 남산 관저에 옮겨져 봉안된 후 석조여래좌상의 모습과 데라우치 총독, 승려 마루야마,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장군이 참석한 개안식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후,
1939년 남산에서 현재의 청와대인 경복궁 뒤에 신설된 경무대 관저로 이운되었다. 경복궁으로 이안되기 전 남산에서의 석불 봉안과 일본인들의 이 행위를 빗대어 『매일신보』(1934년 3월 29일)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과 내용을 실었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오래전 자최를 감초앗던 경주의 보
물 박물관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큰 나무 아래 좌정했으나 비바람에 시달려”
청와대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뒷면
측면
‘(전략) 이 미남석불은 시가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후략)’ 즉, 신문에서는 <미남석불>이라는 명칭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있는 불상이라는 사실과 잘못 옮겨져 수난을 겪고 있는 실태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할 수 있었던 무언의 항변이었을 것이다. 이후, 현재까지도 잘생긴 미남불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근대기에 사용된 미남이라는 명칭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되면서도 잘생긴 모습을 말한다. 당시 미남의 기준과 조건을 이 불상에 적용하였으니 근대기의 미남상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렇듯 유명했던 이 석불은 당시에도 보물로 지정하기 위해 없어진 대좌와 광배 등을 찾고자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경주에 사람을 파견하여 노력한 기록이 1939년에 쓴 <오가와 게이키치 복명서>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대좌와 광배 등을 찾지 못했다. 이 기록에는 원 봉안처도 언급하였다. 원래의 봉안처에 대해서는 남산 삼릉계나 경주 도지동 유덕사지(현 이거사지) 일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는 정도로 당시에도 여러 의견으로 나뉘어져 있다. 단 경주라는 지역은 확실하게 인식된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당당한 어깨와 넓은 가슴, 결가부좌의 안정적인 자세가 특징이다. 얼굴은 방형이며 굵고 큰 나발에 육계는 낮은 편이다. 이마에는 백호를 끼웠던 원형의 구멍이 새겨져 있으며 얼굴에는 두꺼운 눈꺼풀을 가진 반개한 눈과 동그랗게 눈동자를 새겼다. 코 끝 일부는 결실되었으나 전체적으
로 콧망울은 넓적하며, 입은 크고 윤곽선이 뚜렷한 편이다. 양 귀는 길어 귓불이 어깨에 닿을 듯하며, 턱 아래 부분에 한 줄의 음각선을 새겨 이중 턱을, 목에는 음각으로 삼도를 표현하였다.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으로 왼쪽 어깨에 옷자락이 반전되면서 등 뒤로 지그재그의 옷주름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불신에 밀착된 옷주름은 같은 간격으로을 내어 일률적인 주름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통일신라 9세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이다. 왼쪽 팔뚝과 왼쪽다리 앞부분에는 긴 물방울 모양의 옷주름을 새겼으며,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 흘러내린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은 대좌에 따로 조각하여 석불과 대좌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그런데, 대좌 윗면의 부채꼴 옷주름은 다소 앞쪽에 있어 불상 뒷면의 공간이 넓은 편이다. 아마도 광배를 두기 위한 공간일 것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오른쪽 다리 아래로 늘어뜨리고 왼손은 배 앞에 둔 손바닥을 위로 향한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의 검지 끝부분 일부는 없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오른팔과 옆구리 사이를 뚫어 공간감과 입체감을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대좌는 방형으로 현재 상대석만 남아 있는데, 상대석에는 올림연꽃을 새기고 각 잎 안에 원형의 구슬장식 위에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상대석 아래에는 3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방형대좌는 인도 굽타시대에 유행한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말에서 9세기경부터 유행하였다. 청와대 석조여래좌상은 당당하고 넓은 어깨에 양감이 풍부한 불신의 조화가 우수한 불상으로 특히 석굴암 본존불의 전통과 형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상이다. 그러나, 옷주름이나 양감의 표현, 대좌 형식 등에 변화를 준 통일신라 9세기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서울 남산으로 그리고 청와대로 옮겨진 이동과 그 내력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크다. 중요한 점은 청와대 석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의 역사
적 굴곡과 더불어 고다이라 료조의 개인적 욕심으로 원장소에서 벗어나 여러 번 이운되는 고난의 상처를 품고 있는 불상이라는 점이다. 귀중한 문화유산을 마음대로 사유화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정황이 참으로 놀랍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석불이 원래의 장소인 경주에서 서울 남산으로 이안된 지는 100년이 넘었으며 현재의 위치인 청와대에서도 84년이 지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오랜 세월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미소로 우리와 대한민국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 그 굴곡진 역사와 여정을 알았으니 미남석불, 청와대 석조여래좌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될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의 <나의문화답사기>중에서)
남산 관저 개안식 (데라우치 총독, 승려 마루야마,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장군)
남산 관저 개안식 때 석조여래좌상
1934년 3월 29일 <매일신보>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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