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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불행이 행복을 앗아가지 않는 삶이 있을까?”
버스를 타고 네팔 영토의 카필라 왕궁의 성터로 갔다. 붓다 당시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고대의 건물은 무너졌지만, 벽돌로 된 터는 여전히 뚜렸했다. 성벽의 벽돌은 지금도 상당 부분 흙과 수풀에 묻혀 있었다. 2600년 전, 싯다르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나는 카필라 성의 서문이 있던 곳으로 갔다. 서쪽 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조그만 강이 흘렀다. 강 주변에는 집이 여럿 모여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다. 성문 앞에서 만난 인도인 대학생에게 물었더니 “불가촉 천민의 부락”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집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방학이라 고향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인도의 힌두교 신자와 불교 신자들은 장례를 치를 때 화장을 한다. 특히 힌두교는 강가에서 화장을 한다. 갠지즈 강뿐만 아니다. 인도 여행을 하다 보면 강가에서 벌어지는 화장 풍경을 종종 목격한다. 힌두교인은 화장한 뒤의 재를 강물에 뿌리면 망자의 혼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힌두교 신자였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역시 타계 후에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렸다. 인도인 대학생은 “강가에 불가촉 천민의 마을이 있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주로 장례를 치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선 곳은 카필라 성터의 서문이었다. 거기는 싯다르타 왕자가 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드나들며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했다는 ‘사문유관四門遊觀’ 일화의 현장이었다. 실제 그랬다. 팔리어 경전에는 싯다르타 왕자가 서쪽 성문을 나선 뒤에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고 기록돼 있다. 사람들은 시신을 들것에 싣고서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생로병사 중 ‘죽음死’이다. 지금도 그랬다. 성의 서문 밖에는 강이 있었고, 지금도 그쪽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왕자는 물었다. “저것은 무엇이냐?” 시종이 답했다. “장례 행렬입니다.” 망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족이 뒤따랐을 터이다. 싯다르타는 그때 깨달았으리라.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신을 말이다. 그러니 죽음은 마침표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밟아야 하는 삶의 마침표다. 그 마침표 위에서 우리는 소멸한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나의 사라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은 절망하는 존재다.
카필라 성터 안으로 들어섰다. 인도 영토에 있는 카필라 성터보다 유적이 더 실감났다. 관리는 허술해 보였지만, 더 많은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성 안에는 아주 큰 연못도 있었다. 주위에는 잡초와 수풀이 무성했다. 무너진 벽돌이 곳곳에 뒹굴고 있었지만, 당시 카필라 왕궁의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린 싯다르타 왕자는 주로 성 안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바깥 나들이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그가 성의 동문 밖으로 나갔다. 거기서 한 노인을 목격했다. 하얗게 쉰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이는 왕창 빠져 있고, 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워 했다.
싯다르타는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저런 늙음을 겪게 되나? 나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거기에는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가꾸려 하는 팽팽한 피부, 보기만 해도 흐뭇한 풋풋한 젊음, 쉼없이 솟구치는 혈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음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리는 푸름은 영원한 푸름이 아니다. 무너지는 푸름이다. 봄이 영원한 봄이 아니고, 여름이 영원한 여름이 아니듯이 말이다. 가을이 가듯이 청춘도 간다. 싯다르타는 거기서 ‘삶의 시듦’을 목격했다. 그건 필연적 시듦이다. 그래서 필멸의 삶이다.
나는 카필라 성터 안을 거닐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곳곳에 서 있고, 나무의 굵다란 뿌리가 땅위에 드러나 있었다. 나는 무너진 돌기둥 위에 걸터앉았다. 세월의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이천년 하고도 반백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싯다르타 왕자가 품었던 삶에 대한 물음이 한적한 성터에 크게 울렸다. 필멸의 삶에 대한 그의 절망은 지금 우리의 절망이 돼 있다. 그러니 사문유관의 문은 단순한 문門이 아니다. 삶의 희로애락을 직시하게 하는 신랄한 창窓이다.
싯다르타 왕자는 남문 밖으로 나갔다가 병들어 고통 받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을 통해 ‘절망’을 만났다. 그가 보는 삶이란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에 불과했으리라. 분명히 끝이 있고, 거기서 추락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전력질주할 수밖에 없는 소멸의 기관차 말이다. 싯다르타는 고민하지 않았을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라면 왜 피어야 할까?’ ‘저물 수밖에 없는 태양이라면 왜 떠올라야 할까?’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런 물음을 수도 없이 던지지 않았을까.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성의 마지막 관문인 북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낯선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발우를 들고서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수행자였다. 당시 인도에는 온갖 고행과 요가와 수도를 하는 수행자들이 많았다. 싯다르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집을 떠나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려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합니다. 출가는 그걸 위함입니다.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직 이치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 싯다르타의 가슴이 뻥 뚫렸다. 아무런 출구도 없는 삶, 사방이 꽉 막힌 벽. 거기에 느닷없이 창窓이 생겼다. 그 창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생로병사를 거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숙명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과 절망, 이 모든 허무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다. 숫도다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때 싯다르타는 이렇게 이렇게 항변했다.
“아버지, 제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불행이 저의 행복을 앗아가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그런 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싯다르타는 “불타는 집을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출가를 하겠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렇지만 장애가 있었다. 싯다르타가 훗날 출가를 작심했을 때, 그에게는 젊은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성문을 나서는 일이 과연 쉬웠을까.
카필라 성에 해가 떨어졌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싯다르타의 출가를 곰곰이 묵상했다.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의 크기는 비례한다. 절망의 면적과 깊이가 클수록, 희망의 면적과 깊이도 커진다. 붓다의 출가는 우리에게 “세상에 뒤집을 수 없는 동전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뒤집을 수 없는 절망은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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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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