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사회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즘 매체에서 자주 들려오는 말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입니다. 다수의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사람이 밀집한 장소에 가지 말고 되도록 집에서 조용히 지내란 뜻이지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이런 상황이 괴로운 이도 많겠지만 저는 요즘 같은 분위기가 별로 나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오래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방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데서 비롯한다.” ‘홀로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이지요. 고독이 사람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드는 성장의 시간이라면, 외로움은 갈망에서 비롯한 정서적 허기의 시간입니다. 대부분 외로움을 피하려고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고 이로 인한 관계들 속에서 공허한 말들이 교차하고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필연적으로 다시 외로워집니다. 진실한 불자라면 요즘 같은 시기를 외로움이 아닌 자발적 고독의 시간으로 전환해 자신을 발견하는 귀한 시간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니도 그러실 것이라 믿습니다.
방편의 의미
어머니, 오늘부터 ‘방편方便’에 대해 차근차근 공부해볼까 합니다. 방편은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접해본 말이지만, 실제로 방편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면 방편이 실제 신행생활이나 법문에서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A스님이 설법 중에 ‘그건 고작 방편일 따름이지요.’라고 말했다면 방편은 뭔가 불교의 핵심가치가 아닌 부차적인 수단으로써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A스님이 다른 날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불교는 방편에서 시작해서 방편으로 끝나는 종교입니다.’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방편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라는 뜻으로 말이죠. 이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A스님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불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말이 달라졌냐고 설법 중인 스님에게 따져 묻기도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방편은 익숙한 말이되,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개념으로 우리 안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편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방편 가운데 ‘선교방편善巧方便’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방편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것입니다.
원래 방편은 범어 ‘우파야upaya’를 번역한 것으로 우파야는 무엇에 접근하다, 도달하다란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방편은 깨달음과 해탈에 접근하고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지요. 여기서 방편은 깨달음이란 목적을 위한 편의적이고 가변적인 수단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스님이 처음에 말한 방편은 바로 이러한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불교의 방편을 논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방편은 바로 ‘근기根器’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근기란 각자의 정신적 육체적 그릇인데, 사람마다 근기는 각각 다르지요. 근기에 맞지 않는 방편은 불교에서 방편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허기가 져서 배를 채우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이 맥주와 함께 치킨을 먹어 배를 채우든, 아채나 건강식으로 배를 채우든 허기를 면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술과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피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사람이라면 술과 튀김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결코 방편 가운데 하나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때 방편은 다양한 수단이나 방법이란 일차원적 의미를 벗어나 나를 살리는 ‘지혜’와 연관된 것이지요.
A스님이 두 번째로 말한 방편에는 근기에 부합하는 지혜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경전이나 논서에서 방편이란 말은 실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요. 마음을 온전히 다한 수행이나 끊임없이 노력하는 행위를 방편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음을 결정하거나 결심하는 것도 방편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결국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 방편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방편의 어려움
방편을 실생활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쉽고 효율적인 수단은 많습니다. 현재 반에서 중간 정도 성적을 지닌 어떤 학생이 전교1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칩시다. 그 학생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쉬운 방편은 시험지를 몰래 훔치거나 교사나 부모를 통해 정답을 미리 얻는 것이지요. 실제로 최근 한 고등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이런 범죄를 방편이라 부를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은 적당한 반칙과 비윤리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러한 무명無明이 일상화되고 내면화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도 그들처럼 부정과 비윤리적 방법을 통해 나와 내 자식을 위하고 싶지만, 그럴 행동을 취할 위치나 돈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도리어 아쉬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익과 즐거움을 구하는 것은 빠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더 큰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됨을 불자라면 모두 아실 겁니다.
그러나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해서 모두 방편이 아니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팔정도 가운데 정어正語, 바른 말를 공부했습니다. 정어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지요. 그런데 이걸 융통성 없이 ‘불자는 무조건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라고 이해하면 방편의 지혜를 불태우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는 다음과 같은 예시가 실려 있습니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사냥꾼에 쫓겨 절로 들어와서 숨으려는 사슴이나 노루를 보았을 때, 사냥꾼이 와서 ‘성자여, 혹시 사슴이 절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소?’라고 묻는다면, 수행자는 ‘내가 보았소.’라고 답해서는 안 된다. 만약 추운 계절이라면 수행자는 사냥꾼에게 ‘현자여. 잠시 따뜻한 방에 들어 불을 쪼이시오.’라고 말하든가, 더울 때는 ‘현자여. 잠시 시원한 곳에서 냉수를 드시고 쉬시지요.’라고 청해야 한다. 만약 사냥꾼이 이러한 권유에도 ‘나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소. 나는 사슴의 행방을 찾을 뿐이오.’라고 한다면 수행자는 손톱을 보면서 ‘나는 손톱만 보았을 뿐이오.’라고 답해야 한다.
어머니,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옛 수행자들의 순수성과 고결함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사슴을 보지 못했소.’라는 적극적 부정 대신에 자신의 손톱을 보면서 ‘손톱만 보았다.’라고 답하는 것은 최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살리겠다는 지혜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짐승을 사냥해야 살아갈 수 있는 업을 가진 사냥꾼에 대해서 ‘썩 꺼지라.’는 호통 대신 날씨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잠시 쉴 것을 청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런데 이 예시를 비슷한 상황에서 일률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라는데 방편이 지닌 어려움이 있지요. 만약 범죄를 저지른 아들이 집에 찾아와서 몰래 숨겨주고 있는 어머니에게 형사가 들이닥친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형법은 범죄자은닉죄를 규정해서 숨겨준 자를 처벌하고 있지만, 예외로 부모가 자식을 숨겨주면 죄가 되지 않지요. 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라서 법조차도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위치를 형사에게 알려줘서 잡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은 방편일까요, 아니면 거짓말로 계속 아들을 숨겨주는 것이 옳은 방편일까요? 만약 부모의 정으로 숨겨주었다가 이후 아들이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불행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들의 장래를 위한다며 알려주었다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가져서 더 크게 삐뚤어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겠지요. 중생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지요. 그래서 방편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경계에서 사용될 때만 방편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방편을 방편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근기에 맞추어서 선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무마하고 비윤리적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방편’이란 말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옥석을 구분하는 불자들의 명철한 안목이 필요한 시기이죠.
정리하면 방편은 ①이끄는 자가 불보살의 지혜를 갖추고 ②이끌어지는 자의 근기에 적절히 맞춰서 ③자신의 탐욕이 아닌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의도를 지니고 ④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때만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하면 방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방편이 지닌 이러한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대승경전에 나타난 보살과 선지식들입니다. 다음시간에는 대승의 선교방편을 중심으로 법화경과 화엄경 등에서 그 구체적 사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늘 평온하고 건강하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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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