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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싯다르타, 욕망의 민낯을 보고서 출가하다

  • 입력 2020.06.01

싯다르타 왕자는 아소다라와 결혼했다. 2600년 전 인도의 카필라 왕국은 부족국가였다. 당시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열렸고, 고조선의 지배자가 ‘왕’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인도에는 여전히 씨족 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샤카족은 근친혼을 유지했다. 싯다르타 왕자가 결혼한 아소다라도 남이 아니었다. 친고모의 딸이었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는 아미타라는 누이가 있었다. 아미타는 이웃 나라인 꼴리아족에게 시집을 갔다. 거기서 낳은 딸이 아소다라다. 결국 싯다르타는 친고모의 딸과 결혼한 셈이었다. 샤카족은 혈육의 순수성을 잇기 위해 사촌끼리 종종 결혼을 했다. 경전에는 아소다라가 ‘아름답고 연민의 정이 있는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인도를 순례하면서 가끔 결혼식 풍경을 목격했다. 인도의 결혼식은 성대하다. 호텔을 빌려서 밤새 하객을 맞으며 잔치를 한다. 결혼 비용도 상당하다. 싯다르타 역시 그런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을 터이다. 숫도다나 왕은 싯다르타의 결혼이 ‘족쇄’가 되길 바랐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명상과 출가에 관심이 많았던 싯다르타가 딴 마음을 먹지 않기를 바랬다. 왕국을 계승해야 할 외아들이었으니까.

 

나는 카필라 성터에서 동서남북, 사문을 돌아본 뒤 다시 동문으로 갔다. 바로 이 문을 통해 싯다르타는 출가했다. 지금은 동문이 있던 자리 주위에 잡초가 무성했다. 동문은 단지 동문이 아니었다. 그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삶’에서, 영원을 갈구하는 ‘초월의 삶’을 향해 대딛는 출구였다.

 

그렇지만 싯다르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당시 그는 신혼이었다. 아내 아소다라는 첫 아이를 낳았다. 남 모르게 출가를 고민하던 싯다르타에게는 커다란 족쇄였다. 실제 아소다라의 출산 소식을 들었을 때 싯다르타는 “라훌라자토Rahulajato”라고 탄식했다. “아, 장애가 생겼구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숫도다나 왕에게 보고가 됐다. 왕은 손자의 이름을 아예 ‘라훌라’라고 지었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란 뜻이다. 외아들이 자식을 볼 때마다 출가의 꿈을 접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사실 싯다르타에게는 여인이 여럿이었다. 북인도 출신의 스님 사나굴다(523~600)가 쓴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는 싯다르타의 여인이 적어도 세 명이라고 돼 있다. 왕자는 계절마다 궁을 바꾸며 살았다. 제1궁에는 아소다라, 제2궁에 마노다라, 제3궁에 구다미란 여인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자식을 낳은 여인은 아소다라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경전 『십이유경十二遊經』에도 싯다르타의 부인이 셋으로 기록돼 있다.

 

 나는 카필라 성의 동문에 서서 ‘아소다라의 생애’를 돌이켜 봤다. 어린 나이에 사촌에게 시집을 왔고, 첫 아들을 낳자마자 남편은 떠나버렸다. 아소다라는 기가 차지 않았을까. 가슴에는 피멍이 들지 않았을까. 또 그런 아소다라의 심정을 싯다르타가 몰랐을까. 아버지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돌이키기 힘든 절망과 원망과 낭패감을 주리라는 걸 싯다르타가 몰랐을까.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결심했을까.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다. 늘 출가를 고민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던 싯다르타가 ‘출가의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가 있었다. 그건 뜻밖에도 밤과 낮의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 욕망의 민낯이었다. 당시 싯다르타가 살던 궁에는 여인이 넘쳤다. 왕자는 밤마다 궁녀들과 연회를 즐겼다. 어쩌면 출가의 꿈을 잊기 위해, 감각적 즐거움에 더 몰두했을 지도 모른다.

 

하루는 궁에서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29세의 싯다르타는 혈기왕성했다. 젊은 궁녀들과 밤늦도록 욕망을 쫓았다. 그러다 곯아떨어졌다. 새벽녘쯤 됐을까. 싯다르타는 눈을 떴다. 그의 눈 앞에 펼펴진 것은 ‘추함’이었다. 잠에 떨어진 궁녀들은 마구 얽혀 있었다. 옷이 벗겨진 채 맨살을 드러낸 궁녀도 있었고, 침을 흘리며 아무렇게나 다리를 올린 채 엎어진 궁녀도 있었다. 간밤에 봤던 화려하고 매혹적인 이들이 아니었다. 그건 화장기를 모두 지워낸 뒤에 드러나는 ‘욕망의 민낯’이었다.

 

그걸 통해 싯다르타는 절절히 깨닫지 않았을까. 세상에 시들지 않는 꽃은 없구나. 소멸하지 않는 육신은 없구나. 무너지지 않는 인생은 없구나. 그러니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구나. 불교경전 『붓다차리타』에는 당시 싯다르타의 심정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여인의 참모습이 이처럼 추하고 불완전한데, 남자들은 다만 옷치장과 꽃단장에 속아서 욕망에 떨어지는구나.”

 

싯다르타는 여인을 지적한 게 아니었다. 욕망의 대상을 지적한 것이었다. 우리도 살면서 욕망의 대상을 쫒는다. 돈이나 명예, 욕정이나 권력을 쫒는다. 그날 밤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그 모두가 끝내는 시들고 마는 꽃임을 말이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아버지의 뜻, 아내의 소망, 자식의 기대를 뒤로 한 채 싯다르타는 삶의 방향을 틀었다.

 

파티장에서 빠져나온 싯다르타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여전히 새벽이었다. 아내는 갓난 아기를 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라훌라가 태어난 지 불과 1주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싯다르타는 우두커니 서서 잠자는 처자식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들이 생겼으니, 왕국의 왕위는 이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까. 침대 옆에서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는 짧은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으리라. 온갖 상념이 스치지 않았을까. 왕자는 신혼의 새댁과 핏덩이 아들을 뒤로 한 채 출가를 작정했다.

 

싯다르타는 동문 앞으로 갔다. 마부 찬나를 불렀다. 자신의 말 칸타카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타고 싯다르타는 궁의 동문을 빠져나갔다. 그게 싯다르타의 출가였다. 나는 동문이 있던 자리 앞에서 눈을 감았다. ‘아, 이 길로 나갔구나. 브라만교의 철학과 베다 사상을 파고들며, 인간의 삶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 온갖 물음을 품었던 싯다르타. 그 거대하고 본질적인 물음을 풀기 위해 그는 결국 이 문을 통해 떠났구나.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그렇게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궁에서 점점 멀어졌겠구나. 온실 같은 성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그는 인도의 낯설고 험한 정글 같은 세상 속으로 자처해서 들어갔구나.’

 

2600년 전의 인도는 지금과 다르다. 그때는 야만의 시대였다. 인도의 숲에는 요즘도 호랑이가 있다. 옛날에는 온갖 맹수가 우글거렸을 터이다. 길에는 강도도 많았다. 출가한 수행자는 주로 숲에서 살거나, 길 위를 떠돌아야 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삶이다. 그래도 싯다르타는 떠났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삶. 그건 너무 유한하고, 너무 허무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돌고도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자 궁을 떠나 숲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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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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