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오고 나서 층간소음으로 한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심야시간에도 뛰듯이 쿵쿵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성인남자의 발걸음은 마음의 안정을 꽤 훼손하더군요. 올라가서 인터폰으로 부드럽게 사정을 이야기했지요. 스피커로 ‘알겠다’는 간단한 대답이 들려왔지만 이후에도 소음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마트에 가서 제가 집에서 신는 실내화와 같은 것으로 한 켤레 사서 ‘이웃 간에 잘 지내자’는 메모와 함께 그 집 문 앞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래도 소음은 줄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괴롭게 지내다 부쩍 진동이 심한 날, 얼굴이나 익힐 요량으로 그 집 벨을 눌렀지요. 해사한 얼굴의 20대 청년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더군요. ‘아파트가 방음이 잘 안 되게 지어졌나보다’라고 좋게 이야기하고 내려왔습니다. 소음은 그다지 줄지 않았지만 그 친구 얼굴을 보고난 후에는 제 마음이 한결 편하더군요. 왜냐면 얼굴을 아는 이가 ‘청춘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증오나 고통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남이 오직 남으로 머물 때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되고, 남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방편과 중도
어머니, 지난 시간에 이어 방편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경은 몇몇 예를 제외하곤 대부분 어떤 주제에 대한 질문과 그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문답식 구성이라고 하지요. 이런 문답식 구성이 가장 극대화된 불전은 무엇일까요? 바로 선어록입니다. 선어록은 모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덕에 선어록을 읽는 사람은 1000여 년 전 과거의 사건을 마치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를 보듯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지요.
선사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선사 한 분이 중국의 조주(趙州, 778~897선사)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나 ‘차나 한 잔 마시게’라는 선사의 말은 익숙하실 겁니다. 그런데 선방의 수좌들에겐 이보다 더 중요한 조주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어떤 학인의 질문에 조주스님이 ‘없다(無)’라고 답한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수좌들이 이 말을 화두로 삼아 공부를 해오고 있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조주의 ‘무(無) 자(字)’ 화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열반경』에선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말합니다. ‘일체중생’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말이니 당연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어야하겠지요. 하지만 조주스님은 ‘개에겐 불성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게다가 조주선사는 학인이 재차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묻자, 두 번째는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有)’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선사가 그 자리에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경계를 벗어난 답이니 일반적 식견으로 이해하거나 접근해선 안 되겠지만, 불교의 ‘방편’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거리로 삼는 것은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면 부처님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가 법을 펼치던 당시에 이웃종교의 수행자인 밧차곳타란 이가 찾아와 붓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고타마여, ‘나(我)’란 것이 있습니까?”
이에 붓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대답을 얻지 못한 밧차곳타가 떠난 후 아난이 붓다에게 여쭙니다.
“세존이시여, 평소 제자들에게 ‘나’란 절대적 실체가 없다(無我)고 말씀하셨는데, 왜 밧차곳타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붓다는 다음과 같이 아난에게 설명합니다.
“아난아, ‘나란 것이 있느냐’고 묻는 유행자(遊行者, 여기저기 떠돌며 수행하는 이) 밧차곳타에게 ‘나란 것이 있다’고 내가 대답한다면, 아난아, 그것은 ‘나란 실체가 영원히 있다’고 주장하는 상주론자인 바라문과 사문들의 편에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난아, ‘나란 것이 있느냐’고 묻는 밧차곳타에게 ‘나란 것이 없다’고 내가 대답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영원히 소멸한다’는 단멸론자 바라문과 사문들의 편에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붓다는 어떤 대답을 내놓더라도 밧차곳타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만 깊어질 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질문하는 상대의 근기를 꿰뚫어 본 것이지요. 가끔 ‘네’, 혹은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답하라고 고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보통 피의자를 신문(訊問)하는 수사관이나 군인, 청문회장의 국회의원이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사건의 진상이나 실체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에 한정됩니다. 평소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다단한 삶은 ‘예’, 혹은 ‘아니오’로 나누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요. 불교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없는 이웃종교인인 밧차곳타가 불쑥 찾아와 ‘나란 것이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를 답하란 식으로 묻는 상황에서 붓다는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이 침묵은 밧차곳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 침묵이야말로 밧차곳타가 쳐놓은 이분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연기법의 의미를 살려서 전하기 위한 붓다만의 교화의 방편인 것이지요. 이런 붓다의 침묵을 ‘중도(中道)의 침묵’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조주스님이 ‘개에겐 불성이 없다’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라고 말을 바꾼 것은 어떤 방편일까요? 조주스님을 찾아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라고 묻는 어느 스님의 태도는 밧차곳타처럼 ‘있느냐, 없느냐’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조주선사는 호방하게 ‘없다’라고 말합니다. 조주선사가 『열반경』에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란 구절이 나오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단호하게 ‘없다’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한 학인이 경전의 구절에 매여 마치 ‘불성’이 옷장 깊숙이 숨겨놓은 진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성을 실체로 이해하면 무늬만 불교도이지 ‘나’란 것이 영원히 상주한다고 믿는 상주론자 바라문이 되는 셈입니다. 조주스님의 ‘없다’는 대답을 통해 질문을 한 학인이 지닌 실체론적 집착과 믿음이 깨져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르침이 끝이 나면 그 학인은 ‘아, 불성 따위는 없구나’라는 허무주의와 단멸론에 빠지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조주선사의 두 번째 방편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불성은 중생에게 반드시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없다’고 단정 짓기도 힘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머니, 이쯤 되면 ‘그래서 불성이 있다는 게냐, 없다는 게냐, 답답하구나’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셨을 겁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살펴볼까요.
“불성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고 또한 없으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이름 하여 중도라 한다.(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
머리가 더 아파지셨나요? 불교의 불성이나 중도, 연기법은 ‘있다, 없다’, ‘우리 편, 나쁜 편’ 등으로 간명하게 선을 긋는 자기만족과 아집 속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명확한 구분이나 사랑과 증오의 경계선이 사라진 그 터전 위에서만 연기법의 묘리가 조금씩 싹을 틔우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연기법이 중도(中道)의 길이자 곧 중생교화의 방편이 되는 것이고요.
붓다는 침묵으로 밧차곳타를 교화했고, 조주스님은 ‘있다, 없다’라는 말로서 학인을 가르쳤습니다. 지혜로운 이가 중생의 근기와 상황에 맞추어 사용한 방편은 각각 다르지만 그 목적지와 내용은 중도로 동일합니다. 붓다는 침묵으로 ‘있다, 없다’라는 이분법 자체를 막아버리는 방법을 썼고, 조주스님은 ‘있다, 없다’를 모두 긍정함으로써 이분법을 벗어나게 했지요.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쌍차쌍조(双遮双照)’의 중도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쌍(双)은 극단에 선 양 변(邊)을 말하는 것이고, 차(遮)는 ‘차단한다’, 조(照)는 ‘서로 비춘다’는 뜻입니다. 즉 있고 없음을 막아버린 ‘쌍차’는 붓다의 침묵이고, 있고 없음을 모두 말하는 ‘쌍조’는 조주의 가르침이지요. 말과 침묵은 마치 화해할 수 없는 양 극단에 놓여있는 것 같지만, 침묵도 중도의 방편이고, 말도 중도의 방편임은 똑같습니다. 말과 침묵이 각각 중도이니 중도끼리는 또다시 중도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을 중도가 끝없이 펼쳐진다고 해서 중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하지요. 침묵과 말이 서로 중도에 있으니, 말이 곧 침묵이요, 침묵이 곧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선 부처님이 45년간 수많은 설법을 하셨어도 결국엔 한 말씀도 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유마거사는 침묵으로 우레와 같은 불이법문을 설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보살의 모든 방편이 중도에 입각해 있음을 의미하지요.
어머니, 오늘은 이야기가 어려웠다면 제 설명과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건강하시고 지혜롭게 일상을 보내시길 아들이 늘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