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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주지스님과 함께하는 화엄성중 가피순례

천 년 하늘빛 고이 머금은 신라의 화엄 도량

  • 입력 2020.06.01

고운사·봉정사·부석사 

 

▲ 고운사 극락전 삼존불

아주 오래된 고적함, 최치원의 화엄세계
고운사孤雲寺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대사(625~702)는 신라 땅 곳곳에 화엄종 사찰 10여 개를 건립함으로써 화엄세상을 꿈꾸었다. 경북 의성의 등운산 고운사孤雲寺는 의상 대사가 681년(신문왕 원년)에 지은 천삼백여 년된 고찰이다. 왕명을 받아 세운 영주 부석사(676년 창건)보다 4년 늦은 개산이었지만, 고운사는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등 약 60개 말사를 둔 조계종 제16교구본사이며 해동 제일의 지장도량으로 위상이 높다.
‘부용반개형상芙蓉半開形象(반쯤 핀 연꽃 모양새)’의 천하 명당에 자리 잡은 고운사는 의상 대사 창건 당시  ‘등운騰雲’이라는 산 이름을 따서 ‘드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렸다. 그러나 훗날  ‘자기를 낮추는 선비’를 뜻하는 최치원崔致遠(857~?)의 자子 ‘고운孤雲’을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었다. 최치원은 창건주인 의상 대사처럼 당나라에 유학 가서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도 살다 온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석학이었다. 유불선儒彿仙에 두루 통달했으며 특히 불교의 화엄종에 관심이 높아, 여지如智·여사如事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경북 유형문화재 151호)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는 등, 고운사와 인연을 맺었다. 가운루는 누각과 강당의 기능을 둘 다 갖춘 건물로, 화엄학 강설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고운사 약사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46호) / 고운사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 / 고운사 연수전(경북 유명문화재 제470호)


고운사는 고려 때 도선 국사가 다시 한 번 크게 가람을 일으켰는데, 약사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이 그 당시 조성되었다. 9세기 신라 불상 양식의 석조여래좌상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고, 최근에 그동안 사중에서 따로 보관해온 하대 받침석이 이 불상의 것으로 확인되어 내년까지 이를 복원할 계획이다.   
대웅보전 맞은편 울창한 숲에 가려진 나한전은 자칫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소박하고 호젓한 돌계단을 열 개쯤 올라 무심하게 툭툭 망치로 깨서 쌓은 듯한 삼층석탑 앞에 서면, 천 년 고찰의 정취를 절반은 누린 셈이다. 왼쪽에는 나한전이, 오른쪽 아래로는 가운루와 극락전이 정겹게 서 있다.
극락전의 관음불상 설화가 이채롭다. 조선 숙종 때 당시의 고승 천해 선사가 선정에 들어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한다. 관음보살은 “내가 연이 다한 탓에 이제 스님을 따르겠소”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얼마 뒤 송도 대흥산의 한 암자에서 그 관음보살상을 만난 스님은 그 불상을 고이 고운사로 모셔와 지금의 극락전에 안치했다. 현재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이 주불이고, 관음보살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협시로 서 있다.
  
고운사에서 가장 특이한 전각은 연수전延壽殿(경북 유형문화재 제470호)이다. 1774년(영조 20)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는데, 절에서 볼 수 없는 건축 형태라서 눈에 띈다. 현재 건물은 1887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 봉정사 대웅전 삼존불과 후불벽화 / 영산암


봉황이 머문 아름다운 절,
봉정사.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그 아름다움이 세계인들에게도 인정받아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하늘 오르는 산, 봉황이 머문 절! 자연도 아름답고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도 아름답고, 사람과 자연이 빚어낸 건축물도 아름다운 곳이다.
안동 봉정사는 1972년, 극락전 상량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682년(신문왕 2)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었다. 그 상량문 덕분에 672년(문무왕 12)에 의상 대사의 제자인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다는 것과, 극락전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졌다.
도력이 높았던 능인 스님이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행하던 중에 종이로 봉황을 접어 하늘로 날렸더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날아가 앉았다고 한다. 그곳에 절을 짓고, 봉황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봉정사鳳停寺라고 이름 지었다. 능인 스님은 그후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을 지어 제자들에게 화엄을 전했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손꼽힌다. 정면 세 칸, 측면 네 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에 중수했지만,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보수 공사 때 1625년(인조 3)에 작성한 상량문이 나와  ‘1363년(고려 공민왕 12)에 극락전을 중창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대웅전은 다포계 양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건립 연대 기록은 없지만 고려 말, 조선 초 양식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대웅전 후불벽화인 영산회상도(미륵하생도, 보물 제1614호)는 1428년(세종 10년)에 제작된 현존하는 국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642호)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앞쪽에 깔아놓은 널찍한 툇마루와 난간은 국내 사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드문 형식이다. 고풍스런 만세루(경북 유형문화재 제3252호)에 걸린 ‘天燈山 鳳停寺’라는 현판은 봉정사의 정취에 흠뻑 빠지게 할 만큼 멋스럽다. 조선 숙종 때 지었으며, 성보 사물을 보관하는 고루鼓樓의 기능을 담당한다. 고금당(보물 제449호) 또한 극락전, 대웅전, 화엄강당과 더불어 한국건축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귀한 건축물로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양식이다.

봉정사는 조선 초 당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500여 결結의 논밭을 소유한 대사찰이었다. 전각만 해도 75칸이나 되었지만,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경전과 여러 기록 등을 불태워 자료가 귀하다. 2000년 2월 대웅전 보수 때 목조 불단에서 고려 말에 제작된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그나마 이런 사실이라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대웅전 마당에서 동쪽 방향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영산암이 자리잡고 있다. ‘ㅁ’자 형식의 한옥 구조로, 고택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한껏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의 넋을 빼앗고 만다. 법당인 응진전과 요사채인 송암당, 출입 누각인 우화루가 서로 낡고 삐걱이는 툇마루로 연결되고, 삼성각과 염화실, 관심당 등 작은 전각들이 정원 한가운데의 오래된 소나무와 향나무를 향해 둘러서 있다. 우리나라 10대 정원 중 하나로 칭찬받고 있는 한옥식 정원과 낡은 툇마루, 응진전과 송암당의 고색창연한 민화풍 벽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해 영산암 우화루 문턱은 나날이 더 반질거린다. 다큐멘터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감독)과 영화 〈나랏말싸미〉(조철현 감독) 촬영장소였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99년)와 문재인 대통령(2018년)의 방문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부석사

영주 부석사는 의상 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고 676년(문무왕 16) 창건한 화엄종 중심 도량이다. 『삼국유사』에 나온 창건설화에는 당나라로 유학 가서 인연 맺은 신라의 의상 스님과 당나라 선묘善妙 낭자 이야기가 나온다. 선묘는 의상 스님을 연모했으나 스님의 법문에 감화되어 평생 제자로서 스님을 돕겠다고 서원한다. 선묘는 스님의 귀국길에 스스로 용이 되어 거친 풍랑을 잠재우고, 신라에 도착한 뒤에는 줄곧 스님을 보호하며 따라다닌다. 
의상 스님이 화엄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짓고자 할 때, 선묘는 훼방 놓는 500명의 도둑을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서 겁을 주며 쫓아버린다. 그렇게 지은 절이 영주 봉황산 부석사浮石寺다.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는 지금도 ‘부석’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어 수천 년을 초월한 선묘의 승화된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은 국내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건물 규모와 구조방식, 법식 등 완성도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이다. 검박하지만 우아한 배흘림기둥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너도나도 거기에 기대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불(국보 제45호)은 전각 정면이 아닌 동쪽의 왼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쪽 언덕에 삼층석탑이 서 있고, 더 위쪽으로 가파른 숲속 길을 꽤 올라가면 의상 대사 진영을 모신 조사당이 나온다. 선비화는 그 뜨락에서 ‘보호’받고 있는데, 의상 대사의 지팡이가 되살아났다는 골담초 나무다. 선묘 낭자를 모신 선묘각은 무량수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부석사의 한 가지 특색은 석축과 돌계단이다. 경사가 가파른 절터를 편편하게 고르고 건물을 지으려면 돌로 축대를 쌓고, 경사는 계단으로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절 입구, 맨 아래 천왕문부터 맨 위 무량수전까지를 사바에서 극락을 향해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열반의 언덕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듯이….
부석사에는 국보 5점(제18호 무량수전, 제19호 조사당,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제45호 소조여래좌상, 제46호 조사당 벽화)과 보물 4점(제249호 삼층석탑, 제255호 당간지주, 제735호 고려목판, 제220호 자인당 비로자나불), 기타 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원융국사비가 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를 비롯해서 200명의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또는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이라고 입을 모았다는 봉황산 부석사. 그곳의 신록은 봄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노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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