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우시죠. 올 여름은 더위와 코로나 바이러스와 겹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지내시기에 너무 힘든 시간이 될 것 같아서 걱정이 큽니다. 이처럼 물리적 상황도 힘든데 정신적으로는 더 힘든 상황이지요. 이 시대를 포스트 투루스post-truth시대라고들 부릅니다. ‘진실 너머’의 시대라는 뜻이지요. 공동체의 정의나 진실보다는 자신의 믿음이나 자신이 속한 진영의 승리가 더 중한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극단적으로 나뉘어서 상대의 절멸을 외치는 일만이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잡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이분법이 야기하는 고통에서 빠져나와 제법의 실상을 파악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중도의 지혜로써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귀하고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불자들만이라도 불타오르는 증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을 늘 중심에 두는 지혜롭고 청량한 삶을 꾸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지녀봅니다.
법화경과 방편
어머니, 우리는 지금까지 방편의 의미와 성격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방편이란 불보살이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행하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말하며, 방편의 성격은 중도(空)의 가르침이지요. 오늘은 그 방편이 경전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방편의 첫 문을 열 경전은 『법화경』입니다. 수많은 경전 가운데 왜 『법화경』인가 물으신다면, 『법화경』이야말로 방편의 묘미를 가장 잘 드러낸 대표적 경전이기 때문이지요. 그 외에도 오래 전부터 대승경전의 꽃이라 불리며 한국불교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법화경』의 독송과 사경이 한국불자들의 주요한 신행방법으로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법화경』 신행과 관련해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법화경』을 여러 번 쓰고 읽는 수행을 했지만 그 내용과 핵심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지인 가운데 불심이 매우 깊은 이가 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와서는 몇 개월 간 잠도 줄여가며 『법화경』 전체를 108번이나 사경해서 그 책들을 탑에 안치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저는 ‘정말 큰일을 했다’고 칭찬한 뒤, ‘그래서 『법화경』의 골수가 무엇이던가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지인이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는 게 아닙니까? 횟수를 채우는 데 집중하느라 그것까지는 살피지 못했다는 겁니다. 대승경전이 워낙 심오하고 난해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법화경』은 수십 번 읽거나 쓰고도 말 한마디 못 뗄 정도로 어려운 경전은 아닙니다. 평생 『법화경』을 연구하고 그 독창적 해석을 바탕으로 천태종의 개조가 된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는 『법화경』이야말로 부처님이 여러 근기의 중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장 완숙한 경지에서 설한 경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화엄경』이 갓 짜낸 생우유의 맛유미, 乳味이라면, 『법화경』은 제호미醍醐味입니다. 제호는 우유를 숙성시켜 얻을 수 있는 최상급의 유제품으로 남녀노소 모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뛰어난 풍미의 고급치즈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화경』은 부처님의 중생제도의 방편이 극에 달한 경전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중생의 입 안에 떠먹여주는 경전을 쓰거나 읽고 나서도 그 맛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전도轉倒’현상, 즉 본말本末이 뒤집힌 상태로 독송과 사경을 했기 때문입니다. 경전의 독송과 사경을 여러 번 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공덕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독송과 사경을 통해 경전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고 그 가르침을 일상에서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공덕을 쌓는 바탕이 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경전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겠지요. 이것이 ‘경전을 수지독송受持讀誦, 받들어 지녀 항상 읽고 외운다함으로써 공덕이 생긴다’란 말이 지닌 참뜻입니다. 인도 바라나시에 갔을 때 저는 힌두교도들이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갠지즈 강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선조나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갠지즈 강에서의 목욕이야말로 자신의 업을 정화시키고 공덕을 쌓는 행위라고 배워왔기에 별 의심 없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그러한 행위가 하나의 문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죠. 당시에 갠지즈 강에 몸을 담그는 이들을 두고 붓다는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말이 옳다면 갠지즈 강물 속에 사는 물고기들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공덕을 지은 것이니 모두 천상에 태어나야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불자라면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무작정 공덕이나 복덕이 생긴다고 믿어선 곤란합니다. 이런 믿음을 지닌 이가 설령 엄청난 불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정법正法의 관점으로 보자면 부질없는 일이 됩니다. 스스로 신심이 깊은 불자라고 믿고 살았던 중국의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 “나는 지금껏 수많은 사찰을 짓고, 수많은 재화를 승가에 보시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큰가?”라고 물었을 때, 달마스님이 “전혀 없다.”라고 대답한 것을 비추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사경이나 기계적 독송이 일말의 가치도 없느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시절인연을 만나면 그 행위가 바탕이 되어서 깨달음의 꽃을 피우는 날도 있을 겁니다. 다만 배고픈 이가 밥을 지어놓고는 실제로 그 밥을 퍼먹는 대신에 ‘내가 밥을 정성스레 지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겠지’라고 생각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법화경』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이란 말로 정의합니다. 삼이란 삼승三乘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른 성문, 연각, 보살도의 세 가지 수행방편을 말하고, 일이란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인 일불승一佛乘을 뜻하지요. 즉 삼승의 갖은 방편을 모두 모아서(會) 중생을 일승의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게(歸) 하는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삼승의 방편에 비해 일승의 진리의 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왜냐면 삼승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고, 일승이야말로 목적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단과 목적지를 명확하게 분리하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의 일승경전을 읽다보면 길을 헤매게 됩니다. 우선 삼승이 없이는 일승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없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삼승과 별도로 존재하는 일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삼승이 모여서 이루는 것이 일승이란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방편과 궁극의 진리의 관계는 같다고도 할 수 없지만, 서로 다르지도 않은 것입니다.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중도이지요. 지난 시간 방편 자체의 중도적 성격과 방편과 진리가 끊임없이 겹치며 펼쳐지는 중도(진리)의 중중무진을 말씀드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편은 『법화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고승들이 『법화경』의 핵심이 「방편품」과 「여래수량품」 두 품에 응집되어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근래 문헌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법화경』이란 경전은 「방편품」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여러 품들이 추가 편집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골수는 방편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방편품」에서 말하는 방편이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아야겠지요.
“사리불아, 내가 성불한 이래로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를 들어 여러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했고, 셀 수 없는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해서 모든 집착에서 떠나게 했으니, 이는 여래가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舍利弗 吾從成佛已來 種種因緣 種種譬喩 廣演言敎 無數方便 引導衆生 令離諸著 所以者何 如來方便知見波羅密 皆已具足.)
여기서 보듯 부처님의 참된 방편은 ‘방편바라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머니, 전에 제가 보시와 보시바라밀의 차이를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보시는 그냥 중생이 자기만족이나 복덕을 바라면서 하는 행위이고, 보시바라밀은 깨달은 불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펼치는 방편이지요.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우선 공空에 대한 체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방편은 아무나 쉽게 수단으로써 남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새겨야 합니다.
또 ‘위에서 갖가지 인연과 비유를 들어 중생을 제도했다’라고 하는 것은 방편의 일종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경전은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와 인연의 방편을 들어 펼쳐집니다. 그러니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방편법을 읽는 것이고, 그 방편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법화경』은 이처럼 난해한 진리를 비유와 인연이란 방편을 사용해 탁월하게 풀어낸 경전입니다. 『법화경』 속의 주요한 방편을 ‘법화칠유(法華七喩,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라고 부르지요. 다음 시간에는 법화칠유를 통해 『법화경』의 내용을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솝우화처럼 우의적인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서 꽤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늘 시원하고 막힘이 없는 보살의 마음으로 건강하게 지내시길 아들이 멀리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