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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싯다르타의 출가는 왜 ‘위대한 포기’인가

  • 입력 2020.07.01

싯다르타의 출가는 상처를 남겼다. 신혼의 아내였던 야소다라에게, 태어난 지 1주일밖에 안 된 아들에게, 졸지에 왕위 계승자를 상실한 아버지에게,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타미에게 두루두루 상처를 남겼다. 싯다르타는 그런 상처를 감수하고서 궁을 떠났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에게 안겨준 그 모든 상처의 무게보다, 훨씬 더 큰 간절함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싯다르타의 출가였다. 

 

버스를 타고 인도의 북부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인도에는 산이 드물다. 들판이 많다. 그래서 나무도 귀하다. 간혹 보이는 숲은 울창하기 그지 없다. 요즘도 인도의 숲에는 호랑이가 산다. 2600년 전에는 어땠을까. 고대 인도에서는 온갖 맹수가 우글거리는 곳이 숲이었다. 그런 위험천만인 숲을 향해 싯다르타는 더 깊이 들어갔다. 당시 인도의 숲은 수행자의 공간이기도 했다.

 

▲ 인도 중부에 있는 아잔타 석굴.

한편 카필라 궁에서는 난리가 났다. 왕자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궁은 뒤집어졌다. 마침 마부 찬나가 말을 끌고 궁으로 돌아왔다. 말의 안장은 텅 비어 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싯다르타는 보이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아내 야소다라는 처소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텅 빈 안장과 함께 말이 성으로 들어서자 싯다르타의 아내는 궁궐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서 하염없이 울었다.’  지금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텅 빈 안장으로 돌아온 말의 목을 껴안고 토해내는 신혼인 여자의 울음. 그건 평생 가슴에 박히는 상처다. 그런 상처가 과연 씻어질 수 있을까. 훗날 부처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야소다라의 상처를 씻어준다. 뿐만 아니다. 야소다라가 품었을 삶의 희로애락에 대한 온갖 풍랑을 잠재운다.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하비닛카마나’라고 부른다. ‘위대한 포기’라는 뜻이다.
 

▲ 아잔타 석굴의 불상. 아침에 햇볕이 들어오면 불상에 생기가 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포기’가 필요하다. 특히 하나를 포기해서 열의 가능성이 열리는 경우라면 포기가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그 하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열리지 않는다. 하나를 틀어쥐고 있느라, 둘·셋·넷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포기를 ‘위대한 포기’라고 부른다. 그는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가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대신, 무한의 가능성을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 밖에는 인도의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골이었다. 인도 순례는 계절이 중요하다. 한국이 겨울일 때 인도에 가야 한다. 그래야 햇볕과 폭염을 견딜 수 있다. 3월부터는 인도의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4~5월만 돼도 섭씨 40~50도까지 쑥쑥 올라간다. 그때는 숨을 내쉬어도 뜨겁고, 숨을 들이마셔도 뜨겁다. 그래서 한국이 겨울일 때 인도 순례를 떠나는 게 좋다. 늦어도 2월 전에는 말이다. 이 시기에 인도에는 유채꽃이 핀다.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노란 유채가 흐드러진 풍경은 참 정겹다.

▲ 바퀴가 셋 달린 인도의 택시와 운전사들.



싯다르타 당시 인도의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에서는 태초에 유일자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 이름이 ‘푸르샤’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였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재自在하는 자였다. 반야심경에도 ‘관자재觀自在 보살’이란 대목이 등장한다. 거기에는 ‘스스로 있는 신’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에 의해서 창조된 게 아니라, 스스로 있는 진리처럼 말이다. 싯다르타도 브라만교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브라만교 경전인 베다를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숫도다나 왕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식도 잃고, 왕국의 계승자도 잃을 참이었다. 그래서 팀을 꾸렸다. 숲으로 들어간 싯다르타를 설득해서 데려올 팀이었다. 우선 왕의 스승격인 왕사王師와 신하의 자제들을 골랐다. 똑똑하게 지혜를 갖춘 싯다르타의 동년배 친구들로 뽑았다. 왕사와 친한 친구들이 가서 설득하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 퇴근 시간대 인도의 교통정체.


그들은 숲으로 갔다. 수소문 끝에 싯다르타를 찾았다. 친구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설득했다. 카필라 왕국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다. 경전의 기록은 이렇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달라. 부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신다. 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모두 포기하는 게 아니다. 진리를 찾는 일이 어떻게 산이나 숲에서만 가능하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진리가 어떻게 산이나 숲에만 있을 터인가. 싯다르타는 대답했다. “재가在家의 삶은 답답하고 번잡하다. 맑지 않은 일들이 어디에나 먼지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출가出家는 드넓은 공간에 사는 일이다.” 팔리어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버스가 멈추었다. 인도에는 휴게소가 별로 없다. 화장실도 마땅치 않다. 버스가 길에서 멈추면 들판에서 볼 일을 봐야 한다. 버스 왼쪽은 여성 승객, 버스 오른편은 남성 승객. 그렇게 양쪽으로 나뉘어서 각자 볼일을 본다. 그래서 여성 승객들은 넓은 보자기를 미리 준비한다. 치마처럼 허리에 둘러서 사용한다. 어찌 보면 참 인간적인 광경이다. 그런 풍경도 인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움이다. 

 

나는 잠시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재가와 출가. 그건 공간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궁이냐, 숲이냐를 따지는 게 아니다. 싯다르타가 지적한 ‘재가의 답답함’과 ‘출가의 광활함’은 우리의 마음을 일컫는다. 싯다르타는 ‘답답한 마음’을 떠나 ‘광활한 마음’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게 그가 말한 출가였다. 그러니 싯다르타의 대답은 우리에게 ‘출가’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단순히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다고 출가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머리를 깎은 출가자의 신분으로, 성직자의 신분으로, 목회자의 신분으로 ‘재가의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또 머리를 기른 채 지지고 볶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출가의 여운’을 풍기는 이들도 있다. 재가와 출가는 집 안에 있느냐, 집 밖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깎느냐, 깎지 않느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왜 굳이 머리를 깎았을까. 그리고 친구들의 설득을 거절했을까. 나는 거기서 ‘절박함’을 읽는다. 그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 절망이자, 그 절망의 바닥을 뚫고자 하는 절박함이다. 그걸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함이다. 그걸 위해 이번 삶을 걸어보겠다는 각오다.

 

결국 왕사만 궁으로 돌아갔다. 싯다르타의 다섯 친구들은 숲에 남았다. 그들도 왕자와 함께 수행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들이 훗날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펼쳤던 다섯 비구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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