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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위세도 당당한 코끼리가 자신을 묶은 밧줄을 끊듯이

  • 입력 2020.08.01
 출가한 싯다르타는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자신의 옷을 사냥꾼이 입던 옷과 바꾸었다. 이제 싯다르타는 헤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걸었다. 당시 인도에는 온갖 수행 그룹이 있었다. 수행 전통도 여럿이었다. 그 중에서도 흔한 게 고행이었다. 고행을 통해 욕망을 끊고, 욕망을 끊음으로 인해 천상에 난다는 믿음이다. 싯다르타는 스승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밧가와를 찾아갔다. 밧가와 역시 그러한 고행주의자였다.
 
밧가와를 따르던 수행자들은 일종의 요가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로 서서 오랫동안 버티거나, 가시덤불 위에 누워서 고통을 자처하는 식이었다. 그들은 풀이나 나무껍질을 먹으며, 해·달·물·불 등 자연의 정령을 숭배했다. 싯다르타는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이런 고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소?”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이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천상에 태어나길 바라오.”


▲ 인도 바이샬리에 있는 불교 성지.

싯다르타에게는 불완전한 답이었다. 설령 욕망을 끊어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해도, 때가 되면 다시 육신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브라만교는 윤회를 믿었다. 싯다르타의 목표는 천상에 태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었다.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그 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돌고도는 생로병사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결국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길을 떠나는 싯다르타에게 “알라라 깔라마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깔라마 역시 이름난 스승이었다.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에서 인도 북동쪽의 바이샬리로 떠났다. 당시 바이샬리는 상업이 무척 발달한 도시국가였다. 2600년 전에 이미 왕정이 아닌 공화정 체제로 도시가 운영되고 있었다. 훗날 등장하는 재가불자 유마 거사도 이곳 바이샬리 사람이었다.

▲ 세계 최초의 대학이었던 인도의 나란다 불교 대학 유적지.


나도 버스를 타고 바이샬리로 갔다.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바이샬리는 상업의 도시였다. 강의 수로가 교역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건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도시였다. 알라라 깔라마는 이곳 바이샬리에서 이름난 요기였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만 300명이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알라라 깔라마를 ‘고요와 평화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카필라바스투에서 바이샬리까지는 먼 길이다. 싯다르타는 그 길을 맨발로 걸어서 갔으리라. 폭염이 쏟아지는 봄과 여름은 아예 낮에는 걸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낮에는 나무 위나 그늘에서 쉬다가, 이른 새벽과 해질녘에 길을 나섰을 터이다. 고왔던 발이 험한 들판에서 수도 없이 까지고 부르텄으리라. 그와 함께 싯다르타는 인도의 거친 땅을 익히고, 몸에는 굳은살이 박히기 시작했으리라.

▲ 나란다 대학 유적지를 찾아온 인도의 여학생들.


알라라 깔라마는 ‘출가한 왕자’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터였다. 싯다르타가 찾아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세도 당당한 코끼리가 자신을 묶은 밧줄을 끊듯이, 그대는 애정의 얽매임을 끊고서 왕위도 버리고 출가했다.” 알라라 깔라마는 “늙은 왕이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출가하는 건 놀랍지 않다. 그러나 한창 쾌락에 젖어들 나이에 왕궁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떠나온 그대는 참으로 놀랍다”며 싯다르타의 비범함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라”고 당부했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때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이었다. 인도에 불교가 태동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라’는 표현이 당시 인도 사회에는 이미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하 프라즈나 파라미타maha-prajna-paramita’이다. 큰 지혜의 배를 타고 이 언덕에서 고통의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닿으라는 뜻이다. 이걸 한자로 음역한 게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다. 우리가 아는 ‘반야심경’이란 명칭의 뿌리다.

▲ 인도 불교 성지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왜 그런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소멸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삶은 본질적으로 허무하다. 거머쥐고자 했던 모든 게 무너지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 허무의 바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 그래서 저 언덕에 닿고자 한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이 언덕에서, 소멸을 넘어서는 저 언덕으로 말이다.
 
알라라 깔라마는 당시 120세였다. 16세 때 출가해 무려 104년째 수행을 하고 있었다. 300명의 제자가 따랐으니 당시로선 상당한 규모의 수행그룹이었다. 이곳에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싯다르타에게는 그걸 면제해 주었다. 알라라 깔라마가 싯다르타에게서 ‘특별한 가능성’을 보았다. 싯다르타는 결국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가 됐다. 출가한 후에 만난 두 번째 스승이었다.
 
바이샬리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온갖 문물과 학문, 사상과 철학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바이샬리에 있었던 알라라 깔라마의 수행그룹도 그랬으리라. 상당히 유연하고 자유로운 환경이지 않았을까. 이곳에 갓 들어간 싯다르타는 주눅 들지 않았다. 300명이나 선배 수행자들이 있었지만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알라라 깔라마는 믿음을 가졌고, 나도 믿음을 가졌다. 그는 정진할 수 있고, 나도 정진할 수 있다. 그는 지혜가 있고, 나도 지혜가 있다. 그러니 알라라 깔라마만 ’텅 빈 고요‘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둘로 보지 않았다. 그는 스승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도 똑같은 잠재력을 봤고, 자신에게서도 똑같은 가능성을 봤다. 알라라 깔라마가 닿을 수 있다면, 자신도 닿을 수 있다고 봤다. 나는 거기서 수행자 싯다르타가 가지고 있던 ‘불이不二의 시선’을 읽는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과감한 기풍을 젊은 싯다르타는 이미 지니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직선적인 물음을 던졌다. “저에게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고리를 끊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알라라 깔라마는 “윤회의 원인은 무지無知와 업業과 욕망이다”고 했다.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이치를 모르고 사는 게 ‘무지’다. 그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들이 ‘업’이다. 자신을 위해 무지와 업을 자꾸만 쌓고 싶은 마음이 ‘욕망’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윤회가 작동한다. 어리석은 씨앗이 자꾸만 심어지고, 가슴 아픈 열매가 자꾸만 열린다.
 
싯다르타는 열심히 수행했다. 시간이 흘렀고, 결국 스승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알라라 깔라마도 한눈에 알아봤다. 싯다르타가 자신과 똑같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말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제안했다. “나와 함께 이 수행 그룹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치자”고 했다. 싯다르타의 생각은 달랐다. 스승의 경지에 도달한 싯다르타는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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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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