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불교 성지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왜 그런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소멸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삶은 본질적으로 허무하다. 거머쥐고자 했던 모든 게 무너지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 허무의 바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 그래서 저 언덕에 닿고자 한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이 언덕에서, 소멸을 넘어서는 저 언덕으로 말이다.
알라라 깔라마는 당시 120세였다. 16세 때 출가해 무려 104년째 수행을 하고 있었다. 300명의 제자가 따랐으니 당시로선 상당한 규모의 수행그룹이었다. 이곳에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싯다르타에게는 그걸 면제해 주었다. 알라라 깔라마가 싯다르타에게서 ‘특별한 가능성’을 보았다. 싯다르타는 결국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가 됐다. 출가한 후에 만난 두 번째 스승이었다.
바이샬리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온갖 문물과 학문, 사상과 철학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바이샬리에 있었던 알라라 깔라마의 수행그룹도 그랬으리라. 상당히 유연하고 자유로운 환경이지 않았을까. 이곳에 갓 들어간 싯다르타는 주눅 들지 않았다. 300명이나 선배 수행자들이 있었지만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알라라 깔라마는 믿음을 가졌고, 나도 믿음을 가졌다. 그는 정진할 수 있고, 나도 정진할 수 있다. 그는 지혜가 있고, 나도 지혜가 있다. 그러니 알라라 깔라마만 ’텅 빈 고요‘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둘로 보지 않았다. 그는 스승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도 똑같은 잠재력을 봤고, 자신에게서도 똑같은 가능성을 봤다. 알라라 깔라마가 닿을 수 있다면, 자신도 닿을 수 있다고 봤다. 나는 거기서 수행자 싯다르타가 가지고 있던 ‘불이不二의 시선’을 읽는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과감한 기풍을 젊은 싯다르타는 이미 지니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직선적인 물음을 던졌다. “저에게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고리를 끊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알라라 깔라마는 “윤회의 원인은 무지無知와 업業과 욕망이다”고 했다.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이치를 모르고 사는 게 ‘무지’다. 그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들이 ‘업’이다. 자신을 위해 무지와 업을 자꾸만 쌓고 싶은 마음이 ‘욕망’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윤회가 작동한다. 어리석은 씨앗이 자꾸만 심어지고, 가슴 아픈 열매가 자꾸만 열린다.
싯다르타는 열심히 수행했다. 시간이 흘렀고, 결국 스승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알라라 깔라마도 한눈에 알아봤다. 싯다르타가 자신과 똑같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말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제안했다. “나와 함께 이 수행 그룹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치자”고 했다. 싯다르타의 생각은 달랐다. 스승의 경지에 도달한 싯다르타는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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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