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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허공의 꽃을 가꾸는 사람들

  • 입력 2020.08.01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말씀에서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허구의 성, 생각의 감옥에 갇혀 산다.’는 표현을 이해하겠다니, 제가 기쁩니다. 사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특히 지금 이 순간 떠오른 생각에 대해 그 정당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 생각에 기반을 두고 다시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고, 이런저런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치지요. 하지만 그 근본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참으로 부질없는 짓입니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 아는 사람 흉내를 내었다.
“맞아요. 부처님, 다들 제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남 탓만 하며 살아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게 나무라듯, 제 입가에 벌겋게 떡칠한 고추장 덩어리는 보지 못하고 남의 얼굴에서는 잇새에 낀 작은 고춧가루까지 지적하며 살지요. 한 발 떨어져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해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이지요.”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해보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그 표현이 참 좋군요. 앞서 배 타고 강가 풍경 바라보기를 예로 든 적이 있지요?”
“예”
“자, 제가 묻겠습니다. 한번 대답해 보셔요. 그런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터무니없는 것일까요? 배에 탄 사람에게 강가 버드나무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럼, 강가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배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입니까?”
“아니요.”
부처님께서 짜증을 부리듯 짐짓 이맛살을 찌푸리셨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까?”
그 짓궂은 표정이 재미난 듯 아내가 한참을 깔깔거렸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부처님께서 앞서 말씀하셨잖아요. ‘잘못된 것은 없다’고.”
“자꾸 아리송한 말씀만 하는군요. 좀 시원하게 설명해 보세요.”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배에 탄 사람에겐 강가 풍경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고, 강가에 앉은 사람에겐 배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요. 잘못이 있다면 배에 탔던 사람이 배에서 내리고도 ‘강가 풍경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고,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 삿대질하고 역정을 내는 것입니다. 그게 터무니없는 짓이지요. 강가에 앉았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에 타서는 ‘이거 이상한데. 배가 움직여야 하는데 왜 강가 버드나무가 움직이지? 이거 뭔가 잘못된 것 아냐?’라고 생각하고 말한다면 그게 터무니없는 짓이지요.”
부처님께서 입을 뾰족이 모으고 살짝 눈을 감으셨다. 여전히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이셨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다 눈을 뜨고 물으셨다.
“그럼,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왜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 상황, 즉 그때 그 장소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다른 상황, 즉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군요.”
아내가 허벅지를 치며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겁니다. 그때 그랬을 뿐이고, 잠시 그럴 뿐입니다.”
부처님이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그땐 그랬다! 잠시 그럴 뿐이다! 자꾸 애매모호한 말씀만 하는군요.”
아내도 따라 웃었다.
“애매모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게 가장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그럴 뿐인데 늘 그럴 것이라 여기고, 그 위치에서 그렇게 보일 뿐인데 어느 위치에서나 그럴 것이라 억지를 부리는 것이지요. 부처님도 앞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저런 인연으로 새빨간 사과가 있는 것일 뿐, 항상 빨간 사과는 없다고. 저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요. 부처님은 또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부처님께서 입꼬리를 치켜 올리셨다.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보라고요? 까짓것 천 가지 만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지요.”
부처님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에 아내와 남편이 동시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부처님도 따라 빙그레 웃으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비유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경험經驗 즉 인식認識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곧잘 근根과 경境과 식識으로 설명합니다. 한번 잘 들어보셔요.”
“네, 부처님.”
“식물이 뿌리가 있어야 살고, 뿌리가 생존의 바탕이 되듯이 우리의 인식認識 즉 경험經驗에도 식물의 뿌리처럼 필수적이고, 성립의 근원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인식기관이지요. 이것을 저는 ‘근根’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와 뇌의 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에 흔히 6근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인식기관만 있다고 인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果]에는 반드시 인因과 연緣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 즉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기관과 더불어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만 인식이란 것이 성립합니다. 눈과 더불어 빛깔이 있어야만 ‘보다’가 성립하고, 귀와 더불어 소리가 있어야만 ‘듣다’가 성립하고, 코와 더불어 냄새가 있어야만 ‘맡다’가 성립하고, 혀와 더불어 맛이 있어야만 ‘맛보다’가 성립하고, 피부와 더불어 감촉의 대상이 있어야만 ‘느끼다’가 성립하고, 뇌와 더불어 기억으로 저장된 과거 경험이 있어야만 ‘생각하다’가 성립합니다. 이와 같이 인식의 대상 역시 여섯 가지이기 때문에 흔히 6경이라 말합니다.
우리의 인식, 즉 경험은 근과 경, 즉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물 역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여섯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를 6식이라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해되십니까?”
“네, 부처님.”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눈은 항상 같은 위치에 있지도 않고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내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떴다.
“네, 동의합니다. 한강에서 배를 타는 비유를 들어 부처님께서 이미 설명해 주셨지요. 관찰자의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셨군요. 눈이 그렇듯 다른 인식기관인 귀와 코와 혀와 피부와 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위치에 고정된 상태, 즉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부처님.”
“인식기관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빛깔·소리·냄새·맛·감촉·기억 역시 마찬가지로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부처님.”
“좋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지 않는 6근과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지 않는 6경이 상호작용해서 만들어낸 6식이 일정한 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인과 연이 변하는데 그 결과물도 당연히 변하지요.”
“맞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경험, 인식의 결과물, 즉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게 됩니다. 동의합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시 그럴 뿐’이라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잠시 그럴 뿐인 것을 두고 이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까 궁리하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이렇게 시도하고 저렇게 시도하는 것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 크게 손뼉을 쳤다.
“몽땅 허튼 생각, 허튼 소리, 허튼 짓이지요.”
“그래서 저는 인식, 즉 경험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두고 ‘허공에 핀 꽃을 보는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부처님. 표현이 너무 점잖으십니다.”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허공에 핀 꽃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나날이 돌보고, 그 꽃에 열매가 맺히면 씨를 거두어 다시 허공에 뿌려서 꽃밭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그치듯 물으셨다.
“그게 누굽니까?”
아내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접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박수를 치며 크게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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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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