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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4)
그리운 어머니. 오늘은 예전 어느 스님이 하신 설법이 기억이 났습니다.
‘여러분, 왜 간절하게 기도해도 부처님이 여러분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지 아세요? 복을 던져주면 그 복에 깔려 죽을까봐, 여러분의 간장종지만한 그릇마저 깨질까봐 안 주시는 겁니다. 안 주시는 게 진짜 불보살의 가피예요.’
그릇을 갖추지 못한 이가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쥐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큰 재앙이 되겠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이를 증명해왔지만, 사람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달콤한 지옥을 향한 경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계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애를 스승으로 삼는 보왕삼매론의 가르침이 더욱 귀한 요즘입니다.
법화칠유
어머니, 오늘은 『법화경』 속의 주요 방편인 ‘법화칠유(法華七喩,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에 대해서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비유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매우 긴요한 방편이라는 것을 말씀드려야겠네요. 비유라고 하면 보통 시를 떠올리게 되지요. ‘내 마음은 호수’라든지 ‘눈은 마음의 창’ 같은 비유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붓다나 보살, 혹은 경전의 편집자들이 시인처럼 문학적인 감성이 풍부해서 비유를 애용했던 것일까요? 모르긴 해도 그분들도 시인 못지않은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비유를 쓰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다양한 근기의 중생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금강경』은 일반적 수준의 불자들이 다가서기엔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구게를 보세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모든 유위법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고 또 이슬과 번개 같으니 응당히 이처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이 실체가 아니고, 영원하지 않다는 소리를 백만 번 반복하는 것보다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라는 비유와 이미지를 들어 단박에 이해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비유 덕분에 우리는 『금강경』이 담고 있는 공空의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화칠유도 이런 측면에서 그 진의를 곰곰이 새겨보아야겠지요.
1. 불타는 집의 비유
가장 먼저 등장하는 화택火宅의 비유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 어느 나라에 나이는 들었지만 재물과 하인들이 넘쳐나는 큰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 장자가 사는 집은 대문이 오직 하나인데, 집의 사면에서 한 번에 불이 일어나 집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장자가 이 모습에 ‘나는 비록 불난 집에서 벗어났지만 내 자식들(20~30명)은 여전히 불난 집에서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태연히 놀고 있구나. 심지어 불길이 몸에 닿아도 그 고통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구나.’라고 걱정합니다.
어머니, 장자와 자식은 누구를 비유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장자는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벗어난 부처님이고, 자식은 무명에 휩싸이고 애욕과 탐욕에 물들어 고통이 고통인지도 모른 채 불타는 세계에 눌러앉은 우리 중생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장자는 불타는 집에 들어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오라고 윽박지르거나, 강제로 안고 나오면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불교가 지닌 방편의 깊이와 미묘함이 잘 드러납니다. 다시 경전의 내용을 따라가 봅시다.
장자는 ‘내게 힘이 있으니 바구니나 궤짝에 애들을 담아서 들고 나오면 되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집에 대문이 하나이고, 노는데 정신이 팔린 애들을 강제로 담아서 옮기다가 불길에 떨어진다면 더 크게 다칠 것이다.’라고 생각해 다른 방법을 찾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거기 있으면 고통스럽게 불에 타죽을 거야’라는 무섭고 두려운 말로 나오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불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고통이고, 무엇이 죽는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장난에만 몰두하지요. 무명이 깊어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지요. 어느 평론가는 토론을 하다가 “말을 해도 못 알아먹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부처님의 목적은 중생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니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장자는 아이들이 평소 좋아하는 장난감을 떠올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귀한 장난감 수레들이 지금 여기 있다. 바로 나와서 가져가지 않으면 나중은 없어. 어서 나와서 이걸 마음대로 타고 놀아라.”
아이들이 그 소리에 비로소 우르르 불이 난 집을 나옵니다. 그러자 장자는 원래 주겠다는 장난감 수레 대신 더 크고 화려한 수레를 줍니다. 이때 아이들은 원래 원하던 수레가 아니었지만, 각각 큰 수레를 타고 전에 없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부처님은 이 비유를 드시고 사리불에게 묻습니다.
“사리불아, 이 장자가 자식들이 원하지 않던 훌륭한 수레를 준 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느냐?”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이 중생이 원한 것을 주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중생을 속인 것일까요? 사리불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장자가 아이들의 목숨을 살린 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그러니 설령 장자가 그 어떤 수레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지요. 하물며 장자가 더 좋은 수레를 주었는데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주변을 보면 처음에는 합격, 사업번창, 건강 등을 기원하러 절에 다니다가 불교의 본질적 가르침에 눈을 뜨시는 분들이 있지요. 한 번 눈을 뜨게 되면 이후로는 이런 일들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불자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부처님이 주신 수레를 잘 타고 다니시는 분들입니다. 불자라면 벤츠나 BMW 같은 장난감 수레에 만족하지 말고 부처님의 큰 수레를 꿈꿔봐야겠지요. 혹시 우리가 이미 받아놓고는 몰라서 쓰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몸에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보배를 찾아 밖으로 헤매는 비유는 이후에 등장합니다.
2. 궁핍한 아들의 비유
궁자유窮子喩는 신해품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이 이해한 불법의 정수를 비유를 통해 부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이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서 수십 년을 타지에서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나이는 많아지고 생활이 궁핍해져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아버지는 그 사이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도 늘 아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재산은 넘쳐나는데 전해줄 아들이 없으니 늘 안타까움으로 나날을 보낼 수밖에요. 아들은 품팔이를 하다가 우연히 아버지 집에 다다라 존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어버립니다. 아들은 ‘저 사람은 왕이거나 왕족일 것이니 괜히 여기서 품을 팔다가는 강제로 붙잡혀서 품삯도 못 받고 노동만 할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 그곳을 떠납니다. 어머니도 짐작하시겠지만,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들은 중생입니다.
아들이 집 앞에 온 날, 아버지는 아들을 한 눈에 알아보았지요. 그래서 사람을 시켜 도망간 아들을 데려오라 시키지요. 심부름꾼이 강제로 아들을 끌고 가려고 하자 아들은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립니다. 기절한 아들을 본 아버지는 방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지요. 그래서 아들을 도망가도록 놓아줍니다.
아버지는 다시 아들에게 행색이 보잘것없는 이들을 보내 ‘똥 치우는 일을 하면 품삯을 두 배로 준다’라고 집으로 유인을 하지요. 그제야 아들은 그 일을 수락합니다. 자기비하와 자기파괴를 오랫동안 해온 사람은 어떤 칭찬이나 조언을 해주어도 거부하고 부정합니다. 불행한 처지에 있어야, 혹은 상황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도리어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병들어 치유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후 아버지는 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아들의 곁에서 같이 똥을 치웁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20년 동안 똥 치우는 일만 고집하는 아들을 곁에 두고 묵묵히 지켜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자 큰 방편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근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할 무렵, 갖은 재화로 가득 찬 창고의 관리를 맡깁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가 자신의 아들이며 모든 재산은 아들의 소유라고 선언하지요.
이 비유에서 보듯 ‘우리는 부처님입니다’란 구호는 방편이 없이 쓰이면 근기에 따라선 매우 허황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 안의 부처를 보라고 말하는 선불교가 오늘날엔 힘을 잃은 것도 그런 이유일 테지요. 하지만 법화경에서 보듯 ‘우리가 본디 부처’라는 가르침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나는 중생이다’란 생각으로 언제까지 똥만 치울지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겠지요.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늘 밝고 당당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아들이 멀리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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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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