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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싯다르타, 스승에게 돌직구를 날리다

  • 입력 2020.09.01
 싯다르타는 스승 알라라 깔라마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허했다. 알라라 깔라마가 머무는 경지는 ‘고요’였다. 눈을 감고 명상에 몰입할 때 찾아오는 평화다. 그 자리는 온통 비어있다. 그래서 그 어떤 파도도 나를 칠 수가 없다. 한없이 고요하고, 적적하고, 아늑하다.
 
그런데 눈을 뜨면 다르다. 조금 전의 고요는 사라지고 만다. 대신 일상의 소리, 생활의 파도, 삶의 고뇌가 자신을 때린다. 그러니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들은 자꾸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눈을 떠서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눈 감았을 때의 아늑함이 눈 떴을 때의 고통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거기서 한계를 느꼈으리라. 인간은 삶을 꾸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눈을 떠야 한다. 눈 떴을 때 나에게 닥쳐오는 현실의 파도와 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그 속에서 길을 내야 한다. 싯다르타가 찾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눈을 감든, 눈을 뜨든 사라지지 않는 고요였다. 우리의 시끄러운 일상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평화였다. 결국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의 곁을 떠났다. 
 
나는 바이샬리에 있는 유적지에 들렀다. ‘불교 8대 성지’에 속하는 순례지였다. 버스를 내렸다. 멀리서도 높다랗게 솟은 아소카 석주가 보였다. 석주 꼭대기에는 사자상이 앉아 있었다. 불교사에서 바이샬리에 얽힌 일화는 많다. 붓다의 수제자들을 무릎 꿇게 한 유마 거사의 고향이고, 붓다가 여성의 첫 출가를 허락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도시다.
 
뿐만 아니다. 불교계는 요즘도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나눈다. 이런 식의 구분이 생겨난 뿌리가 바이샬리에 있다. 훗날 붓다가 열반하고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약 2500년 전이다. 붓다 입멸 후 인도에는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는 스님들도 있었고, 바이샬리처럼 대도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100년의 시간이 흐르자 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다. 
 
산 속에서 고립돼 있던 수행 그룹은 옛날 방식의 계율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었다. 반면 대도시의 수행 그룹은 대중과 소통하며 시대에 맞게끔 계율을 유연하게 바꾸어 나갔다. 그런데 산 속의 수행자들이 바이샬리에 내려왔다가 깜짝 놀란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바이샬리의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었다. 그들의 불교는 붓다 당시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정통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었다.
 
반면 바이샬리 스님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의 눈에는 산 속 불교가 이상했다. 그들은 대중과의 소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옛 것’을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계율에 담긴 본질적인 메시지는 잊은 채,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제도와 계율과 전통에만 집착했다. 바이샬리 스님들 시각에 산 속 불교는 박제가 돼가고 있었다.
 
결국 둘은 다른 길로 갔다. 산 속 불교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ㆍ테라바다 불교’가 되고, 대도시 불교는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ㆍ마하삼기카 불교’가 됐다. 더 훗날 대중부 불교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역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의 ‘대승불교’로 이어지고, 상좌부 불교는 인도 남쪽의 스리랑카를 거쳐 태국이나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 일대로 흘러들어가 ‘소승 불교’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대승과 소승을 나누는 것도 대승 불교적 관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바이샬리는 불교사에서도 뜻깊은 도시였다. 바이샬리의 불교 성지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 있었다. 규모가 굉장했다. 경주에 가면 볼 수 있는 웅장한 왕릉 정도의 크기였다. 다만 흙이나 잔디가 아니라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 달랐다. 그 바로 옆에 6.6m 높이의 아소카 석주가 서 있었다. 석주 기둥에는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을 때, 영국인들이 새겨놓은 영어 낙서가 군데군데 보였다. 예전에는 진신사리탑 주위에 크고 작은 전탑들이 빼곡했다. 지금은 무너지고 탑의 밑동만 남아 있었다. 하긴 천년 세월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말이다.
 
저 탑 안에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가 들어 있다. 그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아서 곳곳에 탑을 세웠다. 바이샬리의 사리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붓다가 남긴 진정한 사리는 뭔가. 그건 유골이나 골즙이 아니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우리를 행복과 평화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까. 그 가르침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고통을 여의고 평화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진신사리탑 주위를 천천히 몇 바퀴나 돌았다. 초기 불교경전인 『숫다니파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철저히 진리를 알도록 하라.” 그랬다. 싯다르타가 바이샬리를 떠난 이유도 그랬다. 알라라 깔라마의 수행은 안으로 통했으나, 밖으로 막혔다. 그건 진리가 아니다. 참된 이치라면 안과 밖, 동서남북, 상하좌우로 통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다. 그러니 바이샬리를 떠나던 싯다르타는 여전히 목말라 있었다. 자신의 삶을 뚫어줄 진리에 말이다.
바이샬리를 떠난 싯다르타는 라즈기르로 갔다. 갠지스 강의 남쪽에 있는 도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갠지스강을 건너 남쪽의 라즈기르로 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인도의 전통 가옥이 눈길을 끌었다. 지붕이 기와였다. 한국 기와보다 가로 폭이 좁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도에서는 기와를 썼던 것이다. 문득 궁금했다. 인도의 기와와 경주의 기와, 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붓다 당시 라즈기르에는 존경받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웃다카 라마뿟따’였다. 그를 따르는 제자 그룹은 무려 700명이나 됐다.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가 300명이었으니, 두 배가 넘는 셈이다. 인도 사람들은 웃다카 라마뿟따를 향해 “해탈의 경지에 있다”며 칭송했다. 그러니 싯다르타도 큰 기대를 걸었을 터이다. 생로병사의 돌고 도는 윤회의 사슬을 끊을 방법을 기대했을 터이다.
 
싯다르타는 웃다카 라마뿟다의 제자가 됐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에 매진했다. 웃다카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가 해탈”이라고 가르쳤다. 수행에 몰두하던 싯다르타가 하루는 스승에게 물었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겁니까?” 웃다카는 답을 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스승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래도 허전했다. 웃다카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깨달음도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았다. 결국 싯다르타는 웃다카의 수행 그룹을 떠나기로 했다. 웃다카가 헤어질 때 싯다르타에게 당부한 말이 인상적이다. “만약 네가 먼저 해탈을 얻는다면, 꼭 이곳으로 와서 우리를 해탈시켜 달라.” 그렇게 당부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내로라하는 스승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알고 보니 그들의 한계는 명백했다. 싯다르타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홀로 수행하기로 작심했다. 싯다르타는 가야 지방의 네란자라 강으로 갔다. 당시 네란자라 강가에 펼쳐진 숲은 ‘고행림’으로 불리었다. 인도의 온갖 수행자들이 이 숲에 모여서 각자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계룡산’쯤 되지 않았을까. 도道를 찾는 온갖 수행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니 말이다.
 
나도 네란자라 강으로 향했다. 숙소는 강가에 있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렸다. 나는 숙소를 나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네란자라 강가에 펼쳐진 모래밭을 걸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떴다. 맑았다. 2600년 전, 싯다르타도 이곳에서 저 별을 바라보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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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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