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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처럼 굳어진 마음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말씀에서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자신을 두고 ‘허공에 꽃밭을 가꾼 사람’이라 표현하시다니, 제가 참 기쁩니다.”
아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공연히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으로 스스로를 묶어 스스로 괴롭혔다는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제 발로 제 다리를 걸고넘어지는 사람,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흐뭇한 미소를 보이셨다.
“저는 사람들에게 ‘바로 보아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바로 보고, 깨달아야 할 대상과 내용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깊이에도 여러 층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무엇을 바로 보아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첫 번째,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첫 번째,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릎을 치면서 “아, 내가 참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하고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입니다.”
아내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제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늘 남 탓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밖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목청만 높였으니…. 이런 저를 두고 ‘깨달음의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격려해 주시다니, 부처님은 참 맘도 좋으십니다.”
부처님께서 눈을 똥그랗게 뜨셨다.
“공연히 당신을 두둔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삶은 뉘우침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이것을 참회懺悔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타인을 괴롭히던 삶, 스스로도 불편하고 타인도 불편하게 하던 삶에서 자신도 타인도 편안하게 하는 삶으로 바뀌는 전환점, 그것이 뉘우침입니다. 그러니 어찌 깨달음의 첫걸음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그 뉘우침이 깊고 강렬하다면 당신은 두 번 다시 부끄러운 어제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담담한 목소리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생각과 감정을 붙잡아 ‘내 마음’이라는 성城을 쌓고, 감옥과도 같은 그 성에 스스로 갇혀 공연히 아우성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렇게 알았다 해서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솔직해서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뉘우침이 깊고 강렬하다면’이란 전제를 달았던 것입니다.”
아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처님께서 상세히 설명해 주신 덕분에 지금이야 ‘내 마음이라 여기며 붙잡았던 것들이 허구의 성이었구나.’ 하고 알고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까마득하게 잊고서 또 다시 좋은 것은 좋고, 미운 것은 밉고, 좋은 것은 가까이하고 싶고, 미운 것은 멀리하고 싶고, 뜻대로 되면 기뻐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우울해하고 슬퍼하고 좌절할 것 같아요.”
부처님께서 아내에게 물으셨다.
“걱정되세요?”
아내가 이맛살까지 찌푸리며 심각한 어투로 대답했다.
“네. 부끄럽지만 아마 저는 그런 바보짓을 반복할 게 뻔합니다.”
부처님께서 깔깔대며 크게 웃으셨다.
“걱정하지 마셔요. 그럼 다시 알고, 다시 깨닫고, 다시 뉘우치면 되죠.”
“뻔히 뉘우치고도 다시 범할 만큼 어리석은 제가 과연 지금처럼 다시 알고, 다시 깨우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고개를 쭉 내밀어 다가서면서 물으셨다.
“뭐가 걱정입니까?”
“부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전엔 전혀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눈이 시원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느꼈고, 가슴이 활짝 열리듯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깨달음, 이 명확함, 이 편안함이 사라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부처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셔요. 다만 그렇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 당신의 마음은 본래 밝고, 본래 깨끗하고, 본래 편안하고, 본래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게 마음의 본성本性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마음이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편안해졌다’고 해도 그 밝음과 깨끗함과 편안함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설령 당신이 본래 성품을 망각하고서 다시 생각과 감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과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 마음의 밝음, 깨끗함, 편안함, 완전함은 끝내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잃어버리고 싶어도 사실은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셔요.”
아내가 여쭈었다.
“부처님, 이렇게 보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 뉘우치고도 다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잠시 침묵에 잠기셨다. 그리고 얼마 후 가볍게 눈을 뜨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란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을 억지로 붙잡아 쌓은 허구의 성’이라고 제가 말씀드리고, 또 당신도 저의 말을 수긍해 저와 똑같이 말씀하셨지요?”
“네.”
“그 깨달음, 그 깨달음으로 인한 뉘우침이 정말 강렬하고 깊다면 당신은 두 번 다시 허구의 성에 갇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로잡힐 까닭이 없고, 다시 쌓을 까닭도 없고 또 무너뜨릴 까닭도 없지요. 왜냐하면 허구虛構이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그 지견知見이 투철하지 못하고, 그 깨달음이 명징明澄하지 못하고, 그 뉘우침이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면, 아마 당신 말씀대로 다시 생각과 감정들을 이리저리 주워 모아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성을 쌓게 될 것입니다.”
아내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로 그 점입니다. 아마 지난날 쌓은 성에서 벽돌 몇 개쯤 빼내고는 오늘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한 경험을 보태어 새로운 성을 쌓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좋습니다. 이해력이 매우 빠르니, 제가 말씀드리기가 참 수월합니다.”
부처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한참 찌푸렸던 아내의 이맛살이 슬그머니 펴졌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사람들이 경험 즉 감정과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내 마음’이라는 성을 쌓아온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당신은 그렇게 해 왔고, 당신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그 감정과 생각의 본성本性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잠깐의 돌아봄도 없었던 이들에겐 감정과 생각의 조각들이 너무도 분명한 실체로 다가옵니다. 쇳덩이나 돌덩어리처럼 단단해 웬만큼 세월이 흘러서는 흠집도 나지 않을 만큼 생생하지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20년 전에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을 저는 지금도 미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환하게 웃으셨다.
“참 영리하십니다. 그렇게 단단한 쇳덩이나 돌덩어리로 쌓은 성이 망치질 몇 번 한다고 무너질까요?”
“아마 대포를 쏴도 수백 발, 수천 발은 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허구의 성’이라고 보고, 알고, 깨닫고, 뉘우친다고 해도 오랜 세월 익어져 습관이 되어버린 그 생각과 감정들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당신의 삶을 장애할 것입니다. 이것을 업장業障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성에 핵폭탄이나 수소폭탄을 한 발 떨어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자리에 성이 있었나?’ 싶을 만큼 흔적도 남지 않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지견과 깨달음과 뉘우침이 크고 깊고 강렬하면 아무리 업장이 견고하다고 해도 한 방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 그럼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 철옹성을 어떻게 허물어버리겠습니까?”
아내가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처님, 긴 세월 익어져 익숙해진 저의 업장은 철옹성보다도 견고하고. 제가 가진 바른 견해와 깨달음과 뉘우침은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핵무기나 대포는커녕 작은 망치 정도라고 할까요? 그러니 어찌 단박에 부셔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뿐, 제가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이 작은 망치 하나로도 끝내 저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그런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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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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