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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욕망과 해탈, 과연 양자택일의 대상인가

  • 입력 2020.10.01

인도에는 오랜 고행 전통이 있었다. 싯다르타 당시에도 그랬다. 몸에서 올라오는 욕망을 참고 또 참는 걸 통해서 에고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온갖 방식의 고행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싯다르타의 수행 역시 고행의 전통,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보드가야의 네란자라 강으로 오기 전에도 싯다르타는 고행을 자처했다. 싯다르타가 바이샬리 도시의 서쪽에 있는 숲에 머물 때였다. 그는 가부좌를 튼 요가 자세로 수행을 했다. 끼니는 숲에서 나오는 나무 열매 등으로 생식을 했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수행 기록이 후대의 불교 수행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걸까. 성철 스님도 출가 후 꽤 오랫동안 생식을 했다고 한다. 송화 가루와 곡식을 빻은 가루를 먹으며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은 “나중에는 영양 부족으로 인해 손톱이 휘는 등 영양 실조 증세가 나타났다. 향곡 스님이 찾아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고 하자, 성철 스님은 ‘내 먹는 건, 내가 알아서 한다’며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며 “당시에는 요즘처럼 제품으로 출시되는 생식이 없었다. 일일이 직접 곡식을 빻아야했다. 준비하기가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나중에 성철 스님은 화식火食으로 바꾸셨다”고 말했다. 어쩌면 성철 스님도 부처님 출가 초기의 수행담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가 기도를 하고 있다. 바닥에는 꽃으로 '만(卍)'가 그려져 있다.


사실 생식이냐, 화식이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건 결기의 문제다. 음식을 먹으면서,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어지는 욕망을 아예 싹부터 자르겠다는 수행자의 옹골찬 결기 말이다.

 

요즘도 사람들은 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을 집으로 초청해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좋은 법문을 청하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싯다르타 당시에도 그랬다. 많은 사람이 숲으로 찾아와 싯다르타를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 모든 초대를 거절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예 음식을 숲으로 싸 가지고 왔다. 싯다르타는 이 음식마저 거절했다.

 

싯다르타는 최소한의 음식만 먹었다. 처음에는 하루 한 끼, 나중에는 며칠에 한 끼만 먹었다. 숲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 열매나 나무뿌리, 심지어 풀잎까지 먹었다. 그렇게 최소한의 생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했다.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자 싯다르타는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당시 인도의 숲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많았다. 싯다르타는 그런 숲에서도 목동이나 양치기, 나무꾼 등과 마주치면 수행처를 옮겼다. 숲을 향해 더 깊이 들어갔다. 밀림에서의 수행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인도의 국립공원이나 밀림에는 호랑이가 꽤 많이 서식했다. 그러니 26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당시 싯다르타는 숲의 묘지에서도 종종 잠을 잤다. 팔리어 경전에는 ‘죽은 사람의 뼈를 베개 삼아 묘지 옆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는 싯다르타의 말이 기록돼 있다. 당시 인도는 고대 힌두교인 브라만교를 믿었다. 브라만교 전통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을 했다. 시신을 헝겊으로 감싸서 장작더미 위에다 놓고 태운다. 인도는 산이 드물고 나무가 귀하다. 그래서 장작이 무척 비싸다. 그건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신을 모두 태울 만큼의 장작을 구하지 못하면 시신은 타다가 만다. 그럼 새와 짐승이 와서 해치운다. 싯다르타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그걸 통해 인간의 육신이 어떻게 소멸되는지 낱낱이 목격했을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는 한동안 제자들에게 공동묘지에 가서 수행할 것을 권했다. 시신이 어떻게 썩고, 해체되는지 관찰하라고 했다. 그걸 통해 육신의 허망함을 깨우치라고 했다. 자아에 대한 제자들의 집착을 떼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심약한 일부 제자들은 그걸 견디지 못한 채 큰 충격을 받았다. 더러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나중에 이 수행법을 금하긴 했지만, 숲에서 수행하던 싯다르타는 묘지에서 지켜본 시신의 부패와 소멸을 통해서 육신의 허망함을 절감했다

 

▲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보리수 경내에서 외국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

싯다르타는 차가운 서리가 내리는 겨울에는 낮에 숲에서 지내고, 밤에는 길에서 지냈다. 또 폭염이 작열하는 여름에는 낮에 길에서 지내고, 밤에는 숲에서 지냈다. 일부러 더 덥고, 더 추운 곳을 택했다. 그 역시 욕망을 끊어내기 위함이었다.
 
네란자라 강에는 강물이 흘렀다. 건기라 그런지,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강가에는 모래밭이 기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맨발에 닿는 모래의 촉감이 좋았다. 강의 이쪽 편에는 고행림이 있었고, 강의 건너편에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가 있었다.
 
고행림에서 싯다르타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그건 숲 속의 고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행림에서 싯다르타의 수행은 아주 엄격했다. 그는 끼니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였다. 나중에는 나무 열매 한 알로 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요즘 상식으로 보면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굶주리며 수행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는 건 아니다. 곡기를 끊다시피 하는 건 수행자의 자세일 뿐, 엄격히 말해 깨달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당시 인도의 수행 전통은 달랐다. 그런 전통이 지금도 면면히 살아있는 자이나교를 보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2600년 전 인도에는 불교와 어깨를 겨루며 큰 세력을 형성했던 신진 종교가 있었다. 마하비라가 다시 일으켜 세운 자이나교다. 마하비라는 석가모니 붓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수행자가 곡기를 완전히 끊고서 수행하다가 앉은 자리에서 아사(餓死ㆍ굶어 죽음)하는 걸 최고의 수행이자 해탈이라고 믿는다. 고행을 통해서 욕망을 이기는 걸 해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이나교 출가자가 “지금 이 순간부터 곡기를 끊고서 수행하다가 열반에 들겠다”고 공개 선언하면 사방에 CCTV가 설치된다. 그의 마지막 수행에는 조금의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이나교 신자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수행자의 해탈을 기원하며 지켜본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런 선언을 하는 자이나교 수행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싯다르타 당시에도 고행에 대한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싯다르타와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싯다르타의 고행을 극구 칭찬했다. 아마도 고행림 일대에 소문이 파다했을 터이다. 싯다르타만큼 철저하게, 또 극단적으로 고행을 자처하며 곡기를 끊다시피 한 이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네란자라 강가에 노을이 내렸다. 저녁달이 희미하게 빛났다. 수행자에게 스승은 지도와 같다.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을 만났고, 세 명의 스승을 떠났다. 고행림의 싯다르타는 이제 아무런 지도도 없이 길을 찾아가는 나그네였다. 그 길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토록 치열하게 수행을 했는데도, 만약 길 끝에 답이 없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욕망과 해탈. 둘 중에 하나를 취하고, 둘 중 하나를 버리는 방식. 이걸 통해서는 깨달음에 닿을 수가 없다. 곡기를 끊으며 욕망의 허리를 꺾으려 하는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이다. 이 길 위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상존한다. 선불교에서는 그걸 “이미 양변에 떨어졌다”고 표현한다. 그건 해탈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 애초부터 조준이 잘못됐다.
 
 죽음의 문턱에서 싯다르타는 그걸 깨달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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