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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아들이 들려드리는 불교이야기

방편(6)

  • 입력 2020.10.01
 그리운 어머니.
서울생활을 접고 시골에 내려온 지 벌써 반년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하늘을 자주 봅니다. 애써 고개를 들지 않아도 길을 걷다보면 눈높이에 맞추어 하늘이 펼쳐집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입니다. 가끔 서울에 일이 있어서 올라갈 때마다 제가 그 곳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정말 복잡해서 혼이 빠질 것 같거든요. 서울을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저는 서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얻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마음의 상처도 깊어지고 병도 얻었지요. 남들은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적적하고 심심하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저는 이제야 좀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풀벌레 소리가 밤마다 제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오늘은 산책길에 앙증맞은 도마뱀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내일은 길에서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요? 어머니와 갈대가 우거진 강변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습니다. 


법화칠유

어머니, 오늘은 『법화경』의 ‘법화칠유法華七喩’ 가운데 네 번째 비유인 화성유化城喩를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성유라는 것은 환술幻術로 성을 만들어 중생을 이끄는 비유를 말하지요. 경전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백 유순이나 되는 험하고 힘든 길이 있는데, 그 길은 인적마저 없어서 무섭고 두려운 길이다. 여러 사람이 이 길을 지나서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때 한 도사導師가 있었는데, 총명함이 뛰어나고 지혜에 통달해서 험로의 막히고 통하는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이 어려운 길을 통과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유순由旬이란 말이 나옵니다. 유순은 고대 인도에서 사용하던 거리단위입니다. 1유순이 얼마인지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대략 10㎞를 웃도는 거리라고 이해하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오백 유순은 5,000㎞가 넘는 거리지요. 그렇다면 단순히 매우 먼 거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당시 경전이 쓰였을 때 오늘날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고, 잘 닦인 길도 아닌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수풀을 헤쳐 나가야 하는 험로에다 인적도 없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니 오백 유순이란 거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상정해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오백유순을 답파해서 궁극의 목표인 보물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단 뜻이지요.
그런데 평범한 이들多衆을 이끌고 이 불가능한 길을 가서 보물을 획득하게 해주려는 한 도사導師가 등장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도자, 안내자, 즉 가이드guide입니다. 이 도사는 다름 아닌 부처님이지요. 예불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하는 것도 여러 세상의 뭇 생명들을 고통에서 건지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스승이란 뜻입니다. 경전의 다음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길을 가던 도중 게으름과 퇴굴심이 생겨 도사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극도로 피로하고 너무 무서워서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어서 이쯤에서 돌아갈까 합니다.”
도사는 이들을 이끌 수 있는 방편이 다양한 사람인지라 이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이들은 어찌하여 큰 보물을 버리고 돌아갈 생각만 할까?’
도사는 방편을 써서 험로의 삼백 유순이 되는 곳에 하나의 커다란 성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두려워도 말고 돌아가지도 마라. 여기에 큰 성이 있으니 쉬면서 뜻대로 할 수 있다. 성에 들어가면 즐거움과 안온함을 얻을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보물도 얻을 수 있다.”
이때 피로해 있던 사람은 마음이 크게 환희로워져서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일이라 찬탄했다. ‘우리가 이제는 악도惡道를 면해 안락함을 얻었구나.’

사람을 인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도자에게 총명함과 지혜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생떼를 쓰는 중생을 탓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명령이나 고함 대신 ‘보여주기’를 택하지요. 붓다는 상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기에 휴식처인 성城을 환술로 그들 마음에 보여주었지요.
여기서 경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만들어낸 성은 벽돌과 진흙으로 세운 실재 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붓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이 있다고 믿게 했던 것입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나오지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을 때 오랜 행군과 물 부족으로 지친 병사들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조조는 ‘조금만 더 가면 매실밭이 있다. 우리는 거기서 매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병사들은 이 말에 침이 돌고 원기를 되찾아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매실밭 대신에 물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매실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말로 힘을 냈던 병사들의 마음에는 분명 매실밭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여주기’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조조의 술책과 불보살의 방편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조조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불보살은 오로지 중생의 이익을 위해 환상이란 방편을 쓸 뿐입니다. 계속해서 경전을 보시죠.

사람들은 방편으로 만든 성에 들어가서 ‘이미 길을 다 왔다는 생각’과 ‘안온하다는 생각’을 냈다. 이때 도사가 사람들이 잘 쉬어서 피로가 사라졌음을 알고 방편으로 만든 성을 없애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나아가야 한다. 보물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큰 성은 내가 방편으로써 만들어낸 것이니 잠시 쉬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여기서 화성의 비유는 끝이 납니다. 도사는 사람들이 그 환상의 성 속에서 충분히 쉬었음을 확인하고는 거기서 계속 머무르는 것을 방지하고자 사실을 밝힙니다. ‘이건 환상이다. 우리의 궁극의 목표는 보물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찾으라고 말한 궁극의 보물은 무엇일까요? 해탈열반이라고 해도 맞고, 깨달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깨달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 비유에 대해 이렇게 해설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가 겁약하고 하열함을 잘 알기에 방편을 써서 중도中道에서 쉬게 하려고 두 가지 열반을 설했느니라. 만약 중생이 두 번째 열반에 머무르면 여래는 이렇게 말씀하느니라. ‘그대들은 아직 다 힘쓰지 않았다. 네가 있는 곳은 부처의 지혜에 가까울 뿐이다. 열반을 얻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단지 여래께서 방편으로 일불승에서 삼승을 말한 것이다.’

어머니, 말이 어렵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여래는 중생의 근기가 낮아서 부득이하게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즉 본디 열반은 하나인데, 방편으로 다른 열반을 제시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방편으로서 두 번째 열반은 니르바나, 즉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합니다. 이게 초기불교의 열반의 개념이자 우리가 아는 깨달음의 정의입니다. 이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 길을 닦아나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백유순이란 거리나 삼아승지겁 같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이는 성문, 연각, 보살의 수준에서 말하는 삼승의 열반입니다. 재밌게도 중생들은 이런 걸 좋아라합니다. ‘나는 중생’이라는 퇴굴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일불승의 열반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부처라는 깨달음이 바로 일불승의 열반이지요. 그렇기에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번뇌와 열반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준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중생들은 부처님 곁에 오지 않습니다. 장자와 거지 아들의 이야기에서 이미 보았지요. 놀라서 도망치거나 기절해버리는 거지요. 그렇기에 여래는 부득이하게 중생의 수준에 맞는 삼승의 열반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삼승의 열반에 도착했을 때, 진정한 깨달음, 즉 ‘너는 중생이 아니라 이미 부처였고, 해탈도 하나의 환상이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이 일불승의 열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성공적으로 활용한 불교의 종파는 어디일까요? 법화종, 화엄종? 아닙니다. 우리가 경전이나 교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길이라 여기는 선종입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선종은 삼아승지겁이니, 오백유순 같은 비유가 필요가 없이 일불승 본연의 가르침을 즉각적으로 전파하는 종파인 것이죠. 이렇게 일승경전(법화경, 화엄경)은 선종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그간 답답했던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실어서 날려 보내시길 아들이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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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강호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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