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한바탕 꿈과 같은데 왜 이리 아등바등 절절 매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귀를 기울이던 남편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이것저것에 매달려 노심초사하다가 하루아침에 와장창 깨져버리는 게 인생이란 꿈이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꿈을 깨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소란스럽고 험악한 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스스로 깨어난다면 최고지만 … 사실 그런 경우는 드물고, 옆에서 깨워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요.”
“그게 누굽니까?”
부처님께서 웃으셨다.
“저지요. 어서 꿈에서 깨라고 여태 두 분을 곁에서 흔들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고, 조금 전 두 분께서 ‘이것저것에 매달려 아등바등 산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 두 분은 무엇에 그리 아등바등 매달리고 계십니까?”
남편과 아내가 멀뚱멀뚱 쳐다보며 서로 대답을 미루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내를 지목하셨다.
“바깥 분에게 물으면 세상의 도를 혼자 다 통달한 사람처럼 대답할 게 뻔하니, 솔직한 우리 보살님이 한번 말씀해 보세요. 보살님의 하루를 행복하게 하고 또 불행하게 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게 무엇입니까?”
부처님 말씀이 칭찬으로 들렸는지, 아내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저는요, 음 … 현재는 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 이젠 남편보다 제 아이가 더 사랑스럽거든요. 하, 하.”
곁에 있던 남편이 입을 삐죽이며 불쾌한 시늉을 했다.
“당신 아들이 내 아들이긴 하지만, 순위에서 밀렸다 생각하니 괜히 서운하구만.”
셋이서 또 깔깔대며 한바탕 웃었다. 그 웃음이 잦아들 무렵 부처님께서 차분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자, 정리해 보겠습니다. 보살님은 계속 아등바등 거리며 살고 싶은가요?”
“아뇨.”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 아들에 대한 애착愛着을 먼저 끊어야 합니다.”
아내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살님이 아들에게 아등바등 매달리는 한 보살님의 삶에서 이런 저런 소란스러움, 즉 번민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부처님께서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씀하셨다.
“보살님 제 이야기를 잘 들어보셔요. 한글로는 똑같이 ‘사랑’이지만 이 단어에 두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중생의 사랑이고, 하나는 보살의 사랑입니다. 저는 이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중생의 사랑을 ‘애착愛着’이라 부르고, 보살의 사랑은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그 애착과 자비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쉽게 구분하자면 애착은 이기적인 사랑이고, 자비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이요? 그 말씀도 잘 이해가 되질 않네요.”
“그래요? 그럼 재차 설명해 볼까요? 이기적인 사랑이란 나의 행복을 위해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타적인 사랑이란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 이제 이해가 됩니다.”
부처님이 웃으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자, 그럼 보살님은 아들에게 애착의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자비의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아내가 또 머뭇거렸다. 대답을 주저하는 모습이 귀여워보였는지 부처님이 또 깔깔거리셨다.
“꽤나 솔직한 분이라 여겼더니, 보살님도 감추고 싶은 게 있군요.”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도 따라 웃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아들 때문에 기분이 좋아 하루 종일 행복하기도 하고, 아들 때문에 속이 상해 하루 종일 불쾌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나기도 하지요?”
아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보살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애착의 사랑입니다. 애착의 사랑은 보살님을 윤회輪回의 삶으로 이끌게 됩니다.”
“윤회요? 죽어서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아수라가 되기도 하고,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짐승이 되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는 그 윤회요?”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현생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현생에서 여러 양상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내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그 말씀도 이해가 되질 않네요.”
“그래요? 그럼 더 풀어서 말해 보지요. 삶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의 삶에서 겪게 되는 행복과 불행은 서로 큰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자면 길고양이의 삶과 인간의 삶을 비교하자면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까요?”
“인간의 삶이 그래도 낫지요. 길고양이는 머물 곳이 없어 이리저리 헤매야 하고, 먹을거리를 찾아 하루 종일 기웃거려야 하고, 볼품없는 음식에도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후다닥거리지요. 자유가 없고 초조하고 불안한 짐승의 삶은 참으로 고단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보살님은 혹시 사랑하는 그 아들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불안하고 초조했던 적이 없습니까?”
아내가 뭔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잔뜩 구겼다.
“있지요, 왜 없겠습니까? 얼마 전에 이 녀석이 시험을 망쳤다며 어찌나 신경질을 부리던지.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저녁도 먹지 않는 녀석을 두고 혼자서 밥을 먹자니 그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더군요. ‘남편에게도 본 적이 없는 눈치를 아들에게 보고 산다.’는 생각이 들자 제 삶이 참 초라하고 우스워지더군요.”
부처님께서 손뼉을 치셨다.
“그게 바로 윤회의 삶입니다.”
“그게 윤회라고요?”
“그때 보살님이 경험했을 불안함과 초조함 그리고 불쾌감은 길고양이들이 늘상 경험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탈을 벗고 길고양이 탈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보살님의 삶은 자유롭고 당당한 인간의 삶보다는 짐승의 삶과 비슷한 구석이 많지요.”
아내가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아들로 인해 불안하고 초조한 일만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그 아들이 공부를 잘 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다면 보살님은 아마 세상 누구보다 행복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저 하늘나라에서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삶을 사는 순간이지요. 또 사랑하는 그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못된 짓만 한다면 애가 타서 바득바득 성질을 부리겠지요. 그렇다면 그 순간은 아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잠시 말씀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하겠지만, 혹여 아들에게 큰 불상사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보살님은 어떻겠습니까?”
“상상조차 하기 싫군요. 아마 지옥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게 바로 윤회입니다. 보살님은 하늘나라 천신처럼 기쁨이 가득 찬 하루를 살 수도 있고, 짐승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하루를 살 수도 있고, 아귀나 지옥에 떨어진 중생처럼 고통에 신음하며 절규하는 하루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삶을 살게 하는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면 바로 그 ‘사랑하는 아들’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애착이 윤회를 초래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