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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에 마침표 찍은 싯다르타는 배신자였나
보드가야 보리수 근처에서 순례객이 오체투지를 하고있다.
6년간 고행을 거듭한 싯다르타는 거의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갔다. 나무 열매 한 알로 하루를 버티었으니 오죽했을까. 경전에 기록된 당시 그의 몰골은 이랬다. ‘엉덩이가 낙타의 발처럼 바짝 말랐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잡히고, 손으로 등을 만지면 뱃가죽이 잡혔다.’ 그러니 거의 뼈만 남은 상태였다.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된 싯다르타 고행상을 보면 경전의 기록이 실감난다. 너무 말라서 온몸의 핏줄이 밖으로 드러나보일 정도다.
당시 싯다르타는 기운도 없었다. 좌선을 하다가 대소변을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그 자리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만큼 약해진 상태였다. 두 눈은 우물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피부는 쪼글쪼글해져 주름살 투성이였다.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싯다르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아버지 숫도다나 왕의 귀에 들어갔다. 아들이 죽을까봐 왕은 옷과 음식을 보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 모든 음식을 거절했다.
나는 네란자라 강가에 섰다. 이쪽은 고행림, 저쪽은 깨달음의 보리수가 있는 보드가야다. 그 사이에 강이 흐른다. 네란자라 강이다. 거리는 지척이다. 그러나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고행과 해탈. 어찌 보면 차안과 피안의 거리만큼 아득하다. 싯다르타가 계속 고행을 고집했다면, 그는 결코 강을 건너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지구상에 불교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깊은 시선과 통찰력으로 6년 고행의 끝자락에 해탈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둑판에 돌을 놓듯이, 자신의 삶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수행의 고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명상의 희열을 맛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뜻밖에도 그것은 어릴 적 기억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성 밖의 농경제에 나갔다가, 홀로 떨어져 잠부나무 아래에 앉아있던 때였다.
당시 어린 싯다르타는 고요와 평안 속에 머물렀다. 수행의 목표가 고행 그 자체가 되면 곤란하다. 모든 고행은 고요와 평안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2600년 전 인도의 수행 전통은 극한의 고행을 쫒고 있었다. 그걸 통한 열반을 쫒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그걸 통해서는 생로병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말이다.
나는 네란자라 강가를 걸었다. 이쯤이었을까, 아니면 저기 저쯤이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싯다르타는 자신의 몸을 씻기 위해 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 몸에 낀 때를 씻었다. 그것은 6년 고행을 향해서 찍는 거대한 마침표였다. 그런 싯다르타를 지켜보며 고행림에 있던 모든 수행자가 비웃었으리라. 그들에게는 ‘고행의 중단=수행의 포기’로 보였으리라. 그러나 싯다르타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네란자라 강은 상당히 자연적인 하천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싯다르타 당시에도 그랬으리라. 강 가장자리의 언덕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을 씻고 난 싯다르타는 그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다 빠져버린 탓이다. 강가에 늘어진 나무의 가지를 붙들고서 싯다르타는 간신히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수자타라는 여성이 건넨 우유 한 잔을 마셨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는 수자타 마을이 있다. 우유를 공양한 수자타가 살았다는 동네다. 차를 타고 나는 그 마을로 갔다. 흙담으로 지은 초가집들, 소를 키우는 외양간, 비뚤비뚤한 동네 골목. 2600년 전에도 동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붓다의 자취를 순례하는 이들은 이 마을을 찾기도 한다. 마을에는 수자타의 공양을 기리는 공양탑이 세워져 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전탑 양식이다. 그 앞에 영어로 된 안내판도 있었다.
몸을 씻고, 우유를 마신 싯다르타를 보며 고행림의 수행자들이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싯다르타와 동고동락하던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탐하고, 고행을 접은 게으름뱅이가 됐다고 여겼다. 다섯 비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싯다르타의 곁을 떠났다.
당시 고행림에는 2만여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속에서 싯다르타는 철저하게 ‘혼자’가 됐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인도의 고행 수행 전통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길을 통해서는 해탈을 이룰 수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로웠을 터이다. 고행림의 어느 누구도 싯다르타의 결심과 결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았을 터이다.
나는 거기서 붓다의 위대함을 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솔직했다. 왕궁을 박차고, 왕위를 뒤로 하고 머리 깎고 출가를 할 때도 싯다르타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주위의 평과 여론에 휘둘리지 않았다. 고행림에서도 그랬다. “과거의 어느 사문과 바라문도, 미래의 어느 사문과 바라문도 나처럼 모진 고통을 경험하진 못할 것이다”라고 장담할 만큼 싯다르타의 수행은 처절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행은 자기 몸만 괴롭힐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싯다르타는 고행림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고행을 접은 싯다르타는 나무를 하나 골랐다. ‘삡팔라’라고 부르는 보리수 나무였다. 싯다르타는 그 아래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다. ‘저 나무 아래에 앉아서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겠다.’ 네란자라 강 주변에는 길 위에도 풀 더미가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그게 길상초吉祥草였다. 싯다르타는 그걸 한 무더기 꺾어서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수자타가 공양 올린 우유죽으로 야자나무 씨앗만한 크기의 경단을 49개 만들어 하루 한 알씩 먹었다고 한다.
나는 아침 일찍 숙소에서 식사를 했다. 메뉴에는 유미죽도 있었다. 싯다르타가 먹었다는 그 우유죽이다. 그러니까 이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유를 이용한 유미죽을 줄곧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릇 가득 담아서 먹어본 유미죽은 고소하고 담백했다. 경전에서 읽었던 유미죽을 실제 먹어보니 뭐랄까, 맛의 현장감이 느껴졌다. 그건 또한 경전에 기록된 붓다의 역사성에 대한 음미이기도 했다.
숙소를 나와 보드가야의 보리수로 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데도, 출입구에는 많은 순례객이 와 있었다. 보리수 나무는 무척 컸다. 아름드리 가지가 하늘을 품듯이 위로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붓다의 깨달음을 기리는 보드가야 대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대탑 안에는 붓다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나는 대탑 안에 들어가 삼배를 했다. 그리고 탑 뒤에 서 있는 보리수로 갔다.
보리수 앞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앉아서 명상에 잠겼다. 보리수 반대편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스님들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서양인들도 꽤 보였다. 나도 보리수 앞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새벽하늘에는 아직 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2600년 전, 바로 이 앞에 싯다르타가 앉아 있었다. 보리수의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인도의 따가운 햇볕을 막으며 그는 이 자리에서 밤낮을 보냈다. 그 자체로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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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보드가야 대탑 앞에서 한 순례객이 기도를 하고 있다.
보드가야 대탑
보드가야 대탑
부처임이 고행했던 고행림 옆의 네란자라 강. 건기라서 물이 보이지 않는다.
새벽에 본 보드가야 대탑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기리는 수자타 마을의 전탑
수자타 마을
수자타 마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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