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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아들이 들려드리는 불교이야기

방편(7)

  • 입력 2020.12.15
 그리운 어머니.
어제는 간만에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말이 친구이긴 하지만, 저보다 10살 가량 많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고, 격의 없이 진심을 나누는 사이라서 호칭과 관계없이 삶의 도반으로 삼고 있는 분이지요.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니 자기 전에 법구경 읽는다고 합니다. 약간 의외여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친구는 소박하고 간결한 문장 속에서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깊은 의미가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수행이 그리 복잡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마음가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법구경을 통해 절절히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대승교학의 험한 봉우리와 복잡한 골짜기를 지나 다시 평원에 서서 잔잔한 바람을 느끼는 친구의 행복한 모습이 떠올라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하루였습니다.

법화칠유

어머니, 오늘은 『법화경』의 ‘법화칠유法華七喩’ 가운데 다섯 번째 비유인 ‘계주유’(繫珠喩, 구슬을 옷에 매단 비유)와 여섯 번째 ‘계주유’(髻珠喩, 구슬을 상투 속에 숨긴 비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둘 다 ‘계주유’로 같지만, ‘계’의 한자가 다르지요. 하나는 매달 계繫를 쓰고, 다른 하나는 상투 계髻를 씁니다. 둘 다 구슬珠에 관한 이야기이니, 서로 비교하면서 그 뜻을 음미하면 좋을 것입니다. 
먼저 다섯 번째 계주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비유는 이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어떤 가난한 이가 부유한 친구 집을 찾아가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들어 누웠는데, 친구는 공적인 일로 당장 자리를 떠나야 했으므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진귀한 보배구슬을 잠든 이의 옷 안에 매어주고 갔습니다. 하지만 취해서 자던 이는 그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일어난 다음 다시 유행遊行을 떠났습니다. 그는 타국에 이르러 먹고살기 위해 일하느라 그 고생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소득에도 그는 만족하고 살았습니다. 이후에 친구가 우연히 그와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깝구나, 친구여. 어찌 먹고살기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예전에 네가 안락하게 살고 오욕을 만족시키라고 진귀한 보물을 네 옷 안에 매어주었다. 지금도 그 보배가 그대로 있거늘 너는 그걸 모르고 이처럼 고생하고 근심에 차서 간신히 먹고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너는 지금이라도 그 구슬을 재물과 바꾼다면 늘 네 뜻대로 살면서 모자람과 궁핍함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기존의 주류였던 상좌부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판하면서 태동했습니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종착지는 아라한이었지요. 아라한은 한자로 응공應供이라고 하며 마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춘 자를 말합니다. 그 자격은 붓다처럼 깨달은 이에게 부여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에 ‘응공’이 들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다시 말해 아라한은 붓다처럼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지요. 대승불교는 당시 주류불교와의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 붓다와 아라한의 개념을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북방불교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교단이 크게 갈리게된 근본분열로 꼽고 있는 사건이 ‘대천오사’라는 것입니다.(이와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십사비법-승려가 금은을 소지하거나 돈을 직접 보시받을 수 있는가 등의 열 가지 문제-으로 근본분열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대천오사는 마하데바(대천)라는 아라한이 주장한 것으로 내용은 당시 불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아라한도 모르는 것이 있고, 가끔은 색욕에 이끌릴 수 있다는 등의 아라한의 다섯 가지 결함을 말합니다. 아라한의 이러한 결함을 거부하느냐, 인정하느냐에 따라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이러한 분열의 역사를 거친 후 생겨난 대승불교에서는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한다고 천명한 목표는 아라한이 아니라 일체종지의 완전함을 지닌 부처님 그 자체가 됩니다. 이제 아라한은 부처님의 한참 아래에 있는, 수행의 방편으로 잠시 머무는 지위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아라한과 부처의 분리와 차등의 성향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법화경과 화엄경 같은 일승경전들입니다. 법화경에서 계주의 비유를 말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부처님도 구슬을 달아준 그 친구와 같아서 보살이던 때 우리를 교화하시어 일체종지를 내는 마음을 구하게 하셨으나, 우리는 곧 잊어버리고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미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 삶이 곤궁해서 적은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중략) ‘여러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얻은 것은 구경열반이 아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너희들로 하여 여러 부처님의 선근을 심으려고 방편으로서 열반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참으로 열반을 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옷 속의 구슬은 바로 중생들이 제각기 지닌 불성의 비유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귀한 불성을 잊고 아라한의 지위에 만족하며 그것이 열반이고 궁극의 깨달음이다라고 여기는 삶에 만족해왔다는 것이지요. 법화경의 내용을 곱십어보면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자격을 갖추려면 무조건 출가를 해서 승려가 되어야 합니다. 아라한이란 오직 출가승단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고, 그 말은 깨달음이나 열반은 일반인들은 넘볼 수 없는 영역이란 말이지요. 초기경전에서 재가자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은 출가자의 수행을 도와서 다음 생에는 하늘에 나는 복을 누리는 것으로 한정됩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깨달음에 있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은 이미 불성이란 무가진보無價珍寶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의 가난한 수준이 아니라 일체종지의 붓다가 되는 무한한 이익과 만족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지금이야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씨앗을 지닌 이)입니다.’같은 말이 너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2000년 전에 이런 말을 누가 했다면 외도라고 비난받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가 등장합니다. 바로 여섯 번째 계주유髻珠喩, 안락행품에 나오는 상투 속 구슬의 비유입니다.

문수사리여. 비유컨대 강력한 전륜성왕이 위세로서 여러 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으려고 할 때, 작은 나라의 왕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전륜성왕은 각종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느니라. 전륜왕이 병사들 가운데 전공戰功이 있는 이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 공에 따라 상을 내리는데 때론 전답과 집과 마을과 성읍을 주기도 하고, 때론 의복이나 장신구를 주기도 한다. 때론 각종 보물인 금과 은, 유리, 마노, 산호, 호박, 코끼리나 말이 끄는 수레나 노비와 백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륜성왕이 상투에 숨긴 밝은 구슬은 주지 않으니, 왜냐면 오직 전륜왕의 정수리에만 이 명주가 있는데 만약 주게 되면 권속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여기서 전륜성왕은 부처님을 말합니다. 작은 나라의 왕들은 번뇌와 무명을 의미하지요. 전공이 있는 자들은 수행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이에게 부처님은 방편으로 각종 경전을 설하고, 선정이나 해탈, 오근과 오력 등의 불교적 재물을 하사합니다. 또 열반이라는 성읍을 내려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님 자체를 의미하는 본질적 명주, 즉 법화경의 내용은 절대 말해주지 않습니다. ‘너도 사실은 부처님이다’라고 말하면 중생들은 놀라고 의심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일 근기를 만나면 부처님은 그 명주를 꺼내서 아까워하지 않고 줍니다.

이 법화경은 모든 세상에서 원망이 많고 믿기 어려워 그전까지 설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설하느니라. 문수사리여. 이 법화경은 모든 여래의 말씀 가운데 제일 훌륭한 말씀이니라. 가장 심오한 말씀이어서 종국에 가서야 알려주는 것이니라. 

법화경의 불성사상은 선불교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성불’, 즉 ‘내 안의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라는 법화경의 선언은 인류의 전진을 위한 불교의 거대한 공헌이자 불멸의 성취라 할 수 있지요. 다만 우리가 이러한 큰 가르침을 받을만한 근기인지는 자문해볼 필요는 있겠지요. 대승불교에서 믿음이나 신심을 강조하고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위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살펴보란 뜻일 겁니다. 
어머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어머니 항시 건강조심 하시고, 마음은 늘 따사롭고 훈훈하시길 아들이 멀리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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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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