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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원각경 미륵보살장 말씀에서

  • 입력 2020.12.15
 부처님 말씀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내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내 눈빛을 떨어뜨렸다. 그런 아내가 신경 쓰였는지 곁에 있던 남편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맘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에요. 아무 것도.”
부처님도 목소리를 낮추고 다정하게 물으셨다. 
“미심쩍은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그런데요…”
아내가 주저하며 말을 얼버무리자, 부처님께서 호탕하게 웃으셨다.  
“셋이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에 무슨 허물 삼을 게 있다고 그리 조심하십니까?” 
너털웃음에 긴장이 누그러졌는지 아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처님께서 왜 ‘애착이 윤회를 초래한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부처님은 윤회를 초월하라고 가르치는 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하지만 사실 전 윤회로부터의 해탈은 꿈꿔본 적도 없습니다. 또한 왜 윤회로부터 해탈해야하는지 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바라는 것은 육도윤회로부터의 해탈이 아니라 윤도윤회 속에서 천상의 삶 쪽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요. 게다가 틀린 말씀도 아니고요.”
부처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수긍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내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물론 저 역시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행복은 해탈이나 열반, 초월적인 지혜나 완전한 깨달음 등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 보살님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뭔가요?”
“저를 속물처럼 보실까 염려스러워 주저했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돈이 많아서 의식주가 풍족하고, 명예가 많아서 따르는 사람도 많고, 질병과 재난 없이 그 부와 명예를 오래오래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산다면 근심 걱정할 일이 적고 웃을 일은 많을 것이니, 그것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음…”
부처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다가 아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제가 지금부터 보살님이 하신 말씀을 되짚어보겠습니다. 보살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행여 말꼬리 잡는다고 오해하지는 마셔요.”
“네, 부처님.”
“그럼, 먼저 행복에 대한 보살님의 정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보살님은 ‘근심걱정할 일이 적고 웃을 일이 많으면 그것이 행복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네, 저는 그래요. 그럼, 부처님은 어떤 게 행복이라 생각하셔요?”
“그렇게 날을 바짝 세우지 마셔요.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보살님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곁에서 팔꿈치로 툭 치면서 아내를 나무랬다. 
“당신도 참, 말투를 좀 부드럽게 … ” 
아내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요?”   
부처님이 큰 소리로 대꾸하셨다. 
“네, 너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부처님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긴장이 풀렸는지 남편과 아내가 따라 웃었다. 그렇게 셋이서 한참을 웃다가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보살님이 저에게 행복이 뭐라고 생각 하냐 물으셨지요. 근심걱정할 일이 적고 웃을 일이 많으면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부처님도 저랑 같은 생각이네요?”
“그렇지요.”
“아휴, 저는 제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괜히 조마조마했잖아요?”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이 잦아들 무렵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자, 그럼 한 걸음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보살님께서 ‘돈이 많아서 의식주가 풍족하고, 명예가 많아서 따르는 사람도 많고, 질병과 재난 없이 그 부와 명예를 오래오래 누리고 살면 근심걱정할 일이 적고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다’고 하셨지요?”
“네.”
“그렇다면, 보살님은 부와 명예 그리고 건강 등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네. 부처님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저는 애매하게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웃으셨다.
“한번 설명해 볼까요? 여러 가지를 다 거론하자면 말이 길어지니, 부와 명예 건강 재난 등등에서 일단 부 하나만 거론해 보겠습니다. 그 ‘부富’라는 것을 ‘돈’이라는 말로 바꿔 사용해도 괜찮겠지요?”
“돈이라는 말이 훨씬 피부에 와 닿네요.” 
“그렇지요? 말을 좀 쉽게 하자면 보살님은 ‘돈이 많으면 걱정할 일이 적고 웃을 일이 많다.’ 즉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네.”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먼저 ‘돈이 행복의 조건이다’에 동의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누군가 절대적인 가난에 처해 있다면, 즉 먹을 음식이 없어 굶주린 상태이거나 입을 옷이 없어 추위에 시달리는 상태이거나 잘 곳이 없어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면, 또는 학비나 공과금이나 의료비 등이 없어 기본적인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그럴 경우 저는 ‘돈이 행복의 조건이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근심걱정을 해결하고 편안한 웃음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고 또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흘을 쫄쫄 굶은 사람을 앉혀두고 열반이니 해탈이니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보살님은 지금 절대적 빈곤상태입니까?”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보살님은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돈이 필요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 다음 ‘돈이 행복의 조건이다’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조금 전 보살님이 제 얘기를 두고 애매하다고 하셨지요? 저는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이 말이 참으로 애매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그 ‘많다’는 단어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수치를 지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적이고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묻겠습니다. 보살님은 지금 돈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아내가 당황한 표정을 보이자, 부처님이 싱긋이 웃었다. 
“많다고 하건 적다고 하건 상관없어요. 보살님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면 해서 자꾸 질문하는 것이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해 보셔요.”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겠군요.”
아내가 싱긋이 웃었다.
“네….”
“그럼, 돈이 얼마나 더 있으면 행복할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그게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남편의 손목에 채워진 단주를 가리키며 물으셨다. 
“보살님, 저 단주에 꿰여진 알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그게…”
“애매하지요? ‘많다’는 단어는 그 단어 하나만으로는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비교치가 필요하지요. 즉 ‘무엇보다 많다’이지 그것만 두고 ‘많다’ 혹은 ‘적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무엇’은 그 무엇보다 적은 것과 비교하면 많지만 그 무엇보다 많은 것과 비교하면 반드시 적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많다’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적은 것과 비교한다.’는 전제조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많다’가 될 수 없지요. 그렇게 애매모호하고 언제든 ‘많지 않다’로 바뀔 수 있는 ‘많다’를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다면, 그 행복 역시 애매모호하고 언제든 ‘행복하지 않다’로 바뀔 수밖에 없겠지요.”
아내가 휘둥그런 눈을 떴다. 
“부처님,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해 주셔요.”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그럼 예를 들어서 말해 볼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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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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