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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앞에 나타난 농염한 세 여인의 정체는?
보드가야 깨달음의 보리수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싯다르타의 보리수는 아름답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가지와 푸릇푸릇한 보리수 잎들. 2600년 전 그 아래 가부좌한 싯다르타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 아름다움은 곱절이 된다. 나는 보리수 주위를 돌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2600년 전, 명상하는 싯다르타’를 떠올렸다.
싯다르타는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고행이란 방식의 수행에는 마침표를 찍은 참이었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 앉았다. 그렇다고 앉자마자 명상에 잠기고, 선정에 들고, 삼매에 빠지고, 깨달음이 온 건 아니었다. 보리수 아래 앉았을 때 싯다르타에게 나타난 건 뜻밖에도 ‘악마’였다.
악마의 이름은 ‘마라 파피야스’다. 한자어로는 ‘마왕파순魔王波旬’이라 부른다. 고행을 막 마쳐 앙상한 싯다르타에게 악마는 속삭였다. “당신의 몸은 말랐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죽을 때가 다 됐다. 당신이 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왜 굳이 수행을 하는가? 그저 베다 경전이나 공부하고, 불을 향해 제사를 지내며 공덕이나 쌓아라. 수행의 길은 참으로 힘들기만 하다.”
악마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그건 싯다르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악마의 속삭임은 여전히 달콤하다. “경전이나 외면서, 제사나 지내면서, 선업이나 쌓자. 그래서 복을 받도록 하자. 수행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수행인가. 그건 너무 어려운 길이지 않나. 힘든 수행은 선방에 있는 수좌들이나 하라고 하자.” 듣기만 해도 솔깃하다.
그런 악마를 향해 싯다르타는 이렇게 답했다. “수행을 향한 내 열정의 바람은 흐르는 강물도 말려버릴 것이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나는 이 구절을 몇 번이나 곱십었다. 보리수 나무에서 불과 수십m만 가면 네란자라 강이 나온다. 열망이 얼마나 강했으면, 거대하게 흘러가는 저 강물조차 말려버릴 정도였을까.
우리는 어떨까. 각자의 삶에서 이토록 강한 열망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유유히 흘러가는 저 강물을 모조리 말려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런 간절함은 어찌 보면 거울의 뒷면이다. 생로병사에 대한 절망감이 그토록 강했기에, 수행에 대한 간절함도 그토록 강했을 터이다.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악마의 속삭임도 나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왜 그토록 강하게 거절했을까. 그 답은 싯다르타의 출가 이유에 있다. 싯다르타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절망하며 출가했다. 생로병사의 문제에 대한 솔루션(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걸 위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런데 악마가 내민 속삭임에는 그에 대한 솔루션이 없었다. 마음의 이치를 찾고자 출가한 수행자에게 마음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았다. 그러니 애초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유혹이었다.
보드가야의 보리수는 새벽녘이 정말 아름답다. 안개 낀 듯한 조명과 동 트기 전의 여명 사이로 자태를 드러내는 보리수는 장엄하다. 보리수 주위에는 늘 순례객들로 북적인다. 크고 작은 공간에 자리를 틀고 앉아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오체투지도 한다. 지구촌 각국의 불교 신자들이 다 모였나 싶을 만큼 국적도 다양하다. 스님의 승복 색깔도 다 다르고, 순례객의 복장과 머리 색깔도 다채롭다.
그렇지만 똑같은 게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붓다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다는 점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내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보드가야 대탑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순례객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명상하는 사람들. 그 열망의 바람을 다 모아서 쏟아 부으면 네란자라 강물이 말라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라는 결국 싯다르타를 굴복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마라의 세 딸이 나섰다. 보리수 아래 앉은 싯타르타 앞에 아리따운 세 여인이 나타났다. 그들의 정체는 악녀였다. 외모는 그렇지 않았다. 농염한 자태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싯다르타를 유혹하고 방해했다.
마라와 그의 세 딸은 어디서 왔을까. 지옥에서 왔을까. 아니면 땅 밑의 어둠에서 왔을까. 아니다. 그들이 온 곳은 다름 아닌 싯다르타의 내면이다. 그 내면에 잠들어 있던 욕망이 눈을 뜬 것이다. 그 욕정과 집착과 우울이 경전에는 ‘마라의 세 딸’로 표현됐을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물음이 올라온다. 마라의 세 딸은 왜 싯다르타의 수행을 방해했을까. 싯다르타는 자신의 길을 가고, 악녀는 또 악녀의 길을 가면 되지 않나. 왜 굳이 보리수 앞에 나타나 싯다르타의 수행을 방해해야만 했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악마는 선善과 악惡이 둘로 쪼개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그런 이분법적 세계에서만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면 어떻게 될까. 선과 악, 그 이분법적 세계가 무너진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선종에서는 이걸 “선과 악, 양변을 여읜다”라고 표현한다.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惡)”고 설했다. 그러니 마라의 세 딸은 잠자코 있을 수가 없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성취하면 자신들의 존재가 ‘공(空)’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영화 ‘매트릭스’와 똑 닮았다. 영화의 주인공 리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 가상의 매트릭스임을 깨닫고자 한다. 매트릭스 속의 요원들은 비유하자면 ‘마라의 딸들’이다. 요원들은 끊임없이 리오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저지하고자 한다. 이유는 똑같다. 리오가 매트릭스가 가상의 세계임을 깨닫는 순간, 자신들은 전기신호(空)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깊이 감상하면 ‘보리수 아래 싯다르타와 마라의 세 딸’ 이야기를 사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 마라는 싯다르타를 날려버리려고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폭우를 퍼부었지만 옷깃도 적시지 못했다. 바위 덩어리와 불 덩어리를 퍼부었지만 싯다르타 앞에서 꽃이 되어 떨어졌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리오와 요원들이 맞대결하는 장면이 이 대목을 그대로 닮았다. 이렇게 싯다르타가 악마의 정체를 깨칠 때마다, 악마는 꽃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깨달음의 보리수, 그 앞에 섰다. 붓다의 가르침이 들렸다. “네 안의 욕망은 악마가 아니다. 꽃이다. 선과 악을 나누는 네 안의 기둥을 무너뜨릴 때, 세상의 모든 악은 꽃이 되어 떨어진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나누는 나의 고집을 꺾어보는 일이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 쏟아질 꽃비를 위해서!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싯다르타를 유혹하는 마라의 세 딸
영화 매트릭스에서 요원들이 전기호로 변하는 장면
영화 매트릭스의 포스터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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