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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아들이 들려드리는 불교이야기

방편(8)

  • 입력 2020.12.15
 그리운 어머니.
잘 지내셨나요? 아쉽지만 이번 회로 어머니와의 불교공부는 끝이 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부족한 글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어머니와 함께 하는 공부가 전에 없이 행복하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셨지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열심히 정진하라.”
맞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출생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생성이 있기에 소멸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중생을 분발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입니다. 대나무가 시작과 끝이라는 마디를 하나하나 맺으면서 성장해나가는 것은 그러한 마디가 없이는 크게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끝이지만 끝이 아닌’ 이야기를 화두 삼아 평소처럼 공부를 이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법화칠유

어머니, 오늘은 『법화경』의 ‘법화칠유(法華七喩)’ 가운데 마지막 일곱 번째 비유인 ‘양의유(良醫喩)’를 알아보겠습니다. 양의유란 훌륭한(良) 의사(醫)에 관한 비유(喩)라는 뜻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경전이나 논서에서 대의왕(大醫王, 위대한 의사 왕)으로 지칭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좋은 의사란 환자의 병을 잘 낫게 하는 사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다양한 근기를 지닌 중생의 병을 잘 다스린 분입니다. 부처님이 마음만 치유하는 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신체적 부분도 함께 치유하는 의사입니다. 왜냐면 원망, 분노, 우울, 불안, 걱정 등의 마음의 병과 신체의 병은 서로 연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현대의학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부처님은 마음을 고치고 육신까지 건강하게 만들어 삶 자체를 새롭게 바꾸는 명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양의유는 「여래수량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지혜롭고 총명하고 처방과 약에 대해 밝아서 여러 병을 잘 다스렸다. 그 의사에게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의사는 일이 있어서 먼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가 떠난 후에 여러 명의 아들이 독약을 먹고 독에 취해 땅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어떤 아들은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어떤 아들은 본심은 잃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를 본 아들은 기쁨에 절하며 말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우매하고 어리석어 독약을 잘못 먹었습니다. 제발 저희 목숨을 구해주세요.”  

불교의 시작과 끝은 고통의 제거입니다. 초기 근본교리인 사성제가 고집멸도(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 제거의 방법)로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명백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는 부처님을 의사에 비유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중생은 그 경중이 있을 뿐 늘 독에 취해 있는 존재입니다. 독은 불교에서 삼독이라 말하는 세 가지 독(탐욕, 성냄, 어리석음)이지요. 그런데 평생 독의 고통 속에서 헤매다 그 독을 제거해줄 부처님을 만났으니 중생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독이 깊숙이 박혀버린 중생은 본심조차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심이란 내가 원래 청정한 부처였다는 믿음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면 다시 본래의 부처로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보시죠.

아버지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들들을 보면서 여러 경험과 방법에 의지해서 그 색깔과 향기, 맛이 뛰어난 좋은 약초를 구하고 조합해서 아들들에게 먹으라고 주면서 말했다.
“이 위대하고 좋은 약은 좋은 색과 향과 맛을 모두 갖춘 것으로 너희들은 이걸 먹으면 속히 고통이 사라지고 다시는 걱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 아들 가운데 본심을 잃지 않은 아들은 이 양약의 색과 향이 모두 훌륭함에 즉시 먹어서 병이 나았다. 그러나 본심을 잃어버린 아들은 비록 아버지가 온 것을 기뻐하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면서도 주는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면 독기가 깊숙이 들어가 본심을 잃어버렸으므로 색과 향이 좋은 약을 보고도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심을 잃어버린 아들과 본심을 잃지 않은 아들의 대비가 나옵니다. 본심을 잃어버린 아들은 근기가 둔한 이로 하근기 중생입니다. 비록 독에 취했지만 본심을 지키고 있는 아들은 예리한 근기를 지닌 상근기입니다. 근기를 말할 때 불교에서는 상하라는 위계 대신에 예리하고 둔하다는 표현을 더 자주 씁니다. 예리한 근기를 지닌 이는 하나만 가르쳐주어도 열을 아는 이라면, 둔한 근기는 열을 다 가르쳐 주어도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심지어 그 가르침조차 거부하고 비난하면서 계속 고통 속에서 머물러 있는 존재이지요. 그렇다면 둔근기는 운명이라 생각하며 모른 척 버려두는 게 상책일까요? 성경에도 나오듯 길잃은 양 한 마리를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진정한 목자이지요. 불교의 자비방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중생을 제도하려 백천 생을 따라다녀 제도함이 불보살의 자비 아니겠습니까? 불교가 방편을 중요시하는 것은 결국 그 자비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얼마나 가여운가. 독이 깊어서 마음이 뒤집혀 나를 보고 기뻐하고 치료를 해달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좋은 약은 먹지 않으니 나는 방편을 써서라도 이 약을 먹게 해야겠다.’ 
그러고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잘 들어라. 내가 지금 노쇠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좋은 약을 여기에 두었으니 너희가 이것만 먹으면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 후 다른 나라로 가서 사람을 통해 아들에게 부고를 알렸다.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크게 슬퍼져서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계셨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해주셨겠지만, 이제 멀리 타국에서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기댈 곳 없는 고아가 되었다.’
아들은 회한과 비통함 속에서 중독된 마음이 서서히 깨어나 아버지가 남긴 약이 색과 향과 맛이 모두 좋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복용해서 독병을 완전히 치유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모두 나았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아들과 만났다.

위의 비유에서 방편이 몇 번 등장했을까요? 모두 두 번입니다. 처음은 좋은 향과 색과 맛을 지닌 완전한 약을 만들었을 때 등장했지요. 이것은 중생의 삼독(三毒)을 다스리는 계, 정, 혜 삼학(三學)의 비유이기도 하지요. 대다수의 중생은 삼학을 지키는 것만으로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문제는 그것조차 거부하는 중생들이지요. 그때 부처님은 좀 더 자극적인 방편을 씁니다. 그렇다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약을 떠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느끼고 깨우치게 만드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니까요. 부처님이 펼친 자극적인 방편은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관한 비유가 무엇 때문에 나왔는지 짚어보아야 합니다. 
좋은 의사의 비유가 속해 있는 곳은 『법화경』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입니다. 여래수량품은 말 그대로 여래의 수명이 얼마인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명은 80세였으니 여래의 수명은 80살인 거 아닐까요?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래수량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차원이 아닙니다. 여래는 영원한 진리의 상징이지요. 따라서 여래의 수명은 곧 진리의 수명이 얼마인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로서의 여래는 불생불멸, 다시 말해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공(空)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석가모니는 탄생과 성도, 입멸이 분명함을 보여주었을까요? 『법화경』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펼치신 방편입니다. 중생은 늘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만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덧셈과 뺄셈이 전부인 사람에게 미적분을 설명해봐야 의미가 없지요. 둔근기의 중생은 시작과 끝, 삶과 죽음, 고통과 해탈 등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편을 통해 그 수준에 맞추어 생명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지요. 마치 의사가 독에 취한 아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거짓 죽음을 알려주었듯이 말입니다. 이제 죽음의 비유가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바로 부처님의 열반이 방편으로서의 열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오신 날, 성도일, 열반일을 특정해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기립니다. 그런데 이건 아주 초보일 때나 유용한 것이지요.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불자라면 부처님이 오신 날도 없고, 가신 날도 없음을 알게 되고, 결국 모든 날이 부처님이 오신 날이자, 깨달은 날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수준에 올라서면 선사의 말처럼 ‘날마다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제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한 해가 또 저뭅니다.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야 가야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아들이 늘 기원하겠습니다.

강 호 진
한양대 법대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저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이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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