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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거울 앞에 서면 저절로

  • 입력 2021.02.01

원각경 미륵보살장 말씀에서 

 

 부처님께서 말씀을 멈추고 찻잔을 드셨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님, 차 한 잔 드셔요.”
부처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차를 마시고, 또 길게 호흡을 고르셨다. 유치원생 꼬마아이가 선생님의 행동을 하나하나 흉내 내듯, 아내 역시 부처님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천천히 차를 마시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한편 신기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제법 흐르고, 드디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정당하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에이, 내 욕심이 컸어. 내가 욕심을 버려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지만 자신의 욕심이 온갖 번민과 갈등의 뿌리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왜 그런가? 진심으로 인정하기가 참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매우 고단하며 또 비효율적이다’는 저의 말에 보살님께서 ‘동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보살님의 그런 반응이 매우 놀랍고, 그래서 내심 ‘정말 동의하는 걸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아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처님 제가 못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랑거리를 하나 내놓으라면 솔직함입니다. 저는 남 듣기 좋으라고 말을 꾸며서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보살님의 삶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아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삶이 바뀐다고요?”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대전쯤에서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리지요. 둘 중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운전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시간이 갈수록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아마 그보다 큰 변화가 삶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아내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저는 욕심을 버리려는 노력과 시도조차 아직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삶에 큰 변화가 생긴다고요?”
“그럼요! 그 변화는 의외로 쉽게 또 당장 일어나게 됩니다.”
아내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욕심 부리고 살던 삶과 달라질 수가 있죠?”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그래서 제가 조금 전에 ‘욕망은 정당하지 않다는 저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던 것입니다. 욕심을 정당하다 여기는 사람은 그 욕심에 바탕을 두고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 대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래서 욕심에 바탕을 둔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고집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꼭 그렇게 느껴야만 하고, 꼭 그렇게 말해야만 하고, 꼭 그렇게 행동해야만 할 것처럼 여기지요. 물불을 가리지 않죠.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마치 식물에게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키우듯이, 작은 불씨에 불쏘시개를 더하고 기름을 붓는 것처럼, 그런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더욱 부추기지요. 
하지만 욕심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정말로 인정하고 제대로 안다면, 그런 사람은 설령 습관처럼 욕심이 일어난다 해도 그 욕심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에 바탕을 둔 감정과 생각과 행동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을 돌아보긴 하겠지요. ‘이런 상황에 꼭 이런 감정으로 대응해야만 할까? 이럴 때 꼭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만 할까?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올 보다 현명한 생각과 행동은 없을까?’ 하고요.”

부처님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셨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는 사람과 돌아보지 않는 사람, 두 사람이 삶에서 보이는 태도와 행동의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큽니다.”
아내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보기만 해도 달라진다고요? 반성하고 고민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곧바로, 즉각(卽刻) 달라집니다.”
“아휴,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 쉽게 설명해 주셔요.”

부처님께서 큰 소리로 웃으셨다.  
“그럼 비유를 들어볼까요? 보살님은 식사를 하고 나면 ‘혹시 잇새에 고춧가루라도 끼지 않았나?’ 하고 거울을 보지요?”
“네, 봅니다.”
“잇새에 고춧가루가 끼어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빼지요.”
“고춧가루를 뺄까 말까 온갖 고민을 하고, 무엇으로 어떻게 빼면 좋을까 온갖 궁리를 하고, 고춧가루 제거하는 동작을 수십 차례 연습한 뒤에 빼려고 시도합니까?” 
“그렇진 않지요. 이쑤시개로 곧바로 빼지요.”
“이쑤시개가 없으면요?” 
“다른 대용품을 찾거나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손톱으로라도 빼지요.”
“그걸 누가 시켜서 합니까?”
“그렇진 않지요. 저절로 그렇게 하게 되지요.”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저절로’라는 그 표현이 참 맘에 드는군요. 거울을 본 사람은 저절로 자신을 단정하게 하듯,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돌아본 사람은 저절로 자신을 바르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곧바로, 당장!”
아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잇새에 벌건 고춧가루가 낀 채로 웃고 떠들던 사람이 거울을 보는 순간, 그 소란스러운 말과 웃음을 당장 멈추겠지요. 자신을 돌아보기만 해도 곧 삶이 달라진다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부처님께서 눈빛을 낮추고 잔잔한 음성으로 물으셨다. 
“잇새에 벌건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낀 채로 신나게 떠들던 사람이 거울을 보는 순간, 처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부끄럽겠지요. 자신이 그런 추한 모습인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으니…”
“고춧가루 낀 정도가 아니라 립스틱이 문질러져 턱밑까지 벌겋고 눈가에 시커먼 검댕까지 묻었다면요?”
“……”
“자신이 그런 모습인 줄도 모르고 앞에 마주한 누군가의 잇새에 낀 작은 티를 흉보았다면요?”
아내가 고개를 낮추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한없이 부끄럽겠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그것을 참회(懺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본 사람과 거울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서 보이는 첫 번째 차이입니다. 자신을 돌아본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신의 행동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아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께서 왜 ‘욕심에 사로잡힌 자신을 진심으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셨다. 
“그래서 서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범부(凡夫)가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들 말합니다. 그럴 때 꽤나 많은 사람들이 범부는 모르고 부처님만 아는 무언가를 찾아 부지런히 내달립니다. 하지만 그렇다할 소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범부가 깨달으려면 부처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에 앞서 자신이 범부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중생이 깨달아야 할 첫 번째 사안이지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처를 알고,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먼저 욕심에 사로잡힌 자신의 삶을 분명히 보아야만 합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듯 자신을 보면 저절로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고, 부끄러운 줄 알면 저절로 버리고 또 고치게 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아내가 다시 눈빛을 반짝였다.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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